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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포럼 2015-5: 초대교회의 풀뿌리 선교 운동에서 배우는 교훈 (손창남, OMF) 프린트   
류재중  Email [2016-12-09 09:31:56]  HIT :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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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풀뿌리 선교 운동에서 배우는 교훈 

손창남, OMF

 

들어가는 말

 

한국 교회는 개신교가 전파된 초기부터 선교에 대한 관심을 가져왔다. 1907년 최초의 장로교 목사 안수를 받은 목사들 가운데서 한 명을 이미 제주도로 선교사를 파송한 바 있으며, 1950년대 아직 교회가 연약할 때에도 중국, 태국 등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 교회의 선교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몇 백에 불과하던 선교사는 현재 200개 국가에서 2만 명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 지난 25년 동안 한국 선교는 물량적인 면에서 엄청난 성장을 기록했다고 말하는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국의 많은 교회와 교인들은 이러한 선교를 감당할 수 있도록 한국 교회를 물질적으로도 강성하게 하셨다고 믿으며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세계 선교를 담당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일 년에 수천 팀이 나가는 해외 단기 선교에서도 드러난다.  

 

하지만 한국 교회가 따르고자 하는 선교의 모델이 과연 성경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검증된 것이며 더 나아가 선교에 관심을 가지는 이삼세계의 교회들이 따르고 싶은 선교의 모델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강한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글에서는 새로운 선교 모델을 성경에서 먼저 찾아보려고 시도했다. 우리는 그 동안 선교의 모델을 사도행전 13장에 나오는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바울을 기도하고 파송하는데서 찾아왔다. 윌리암 캐리의 그 유명한 “이교도 선교 방법론”에서 사도행전 13장, 14장을 ‘이방 세계에 대한 최초의 선교였다고 말하고 있다. (변창욱 역, P50)또한 유명한 성경 주석가들조차도 이 부분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예를 들어 존 스토트도 누가가 사도행전 13장을 선교의 첫 번 기록으로 남기려고 했을 것이라는 전제 아래, 안디옥에 간 무명의 사람들이 전도한 사람들이 헬라어를 쓰는 유대인이었을 것이라는 11장 20절에 대한 해석도 헷갈리게 해 놓고 있다. 

 

하지만 사도행전을 자세히 살펴보면 실제로 선교는 그 이전부터 이루어져 온 것을 볼 수 있다. 8장 초반에 스데반의 일로 인하여 흩어진 사람들에 의해서 복음이 증거 된 것, 그리고 11장 19절부터의 기록을 통해서 이들이 타문화 사역(cross-cultural mission)을 감당했음이 분명하다. 오히려 13장에서부터 28장까지의 바울과 그 팀을 중심으로 하는 선교의 이야기는 누가의 의도에 의해서 특별한 선교사역이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현재 우리의 선교의 모델은 지난 2세기 동안 이루어 온 서구 선교의 모델을 따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0년 전부터 한국에 들어 온 국제단체들을 포함해서 그 후에 시작된 자생단체들의 경우도 결국 지난 날 서구 교회와 선교단체들이 해 온 사역을 답습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하겠다.

본 발제에서는 사도행전 8장에서부터 12장에 이르는 흩어진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풀뿌리 선교 운동에 대해서 고찰하면서 오늘날 이러한 풀뿌리 선교 운동이야말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선교 정신인 동시에 따라야 할 모델임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또한 당시 흩어진 사람들에 의해서 복음이 이방에 전파되었던 사회적 상황을 살피면서 21세기에 합당한 선교사역의 유형에 대해서 살피려고 한다. 

 

I. 성경에 나타난 풀뿌리 선교 운동

 

1. 선교의 정의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한지 100년이 넘었고, 지난 25년 동안 선교의 붐을 이룬 한국 교회의 선교에 대한 인식은 비교적 단순하다고 말할 수 있다. 선교사가 얼마나 파송되었는가 하는 것으로 선교를 인식하려고 하고 있다. 흔히 듣는 말, “한국이 2위 선교국가”가 되었다는 이 표현은 파송된 선교사의 숫자로 이야기 하는 것이 분명하다. 또 이 말 가운데는 은연중 선교란 ‘전임 선교사 (career missionary)’들이 하는 것이라는 전제가 있다. 여기에 조금 더 범위를 넓힌다면 그 선교사를 중심으로 해서 파송교회, 선교단체, 후원자, 이들이 있는 것이 제대로 된 선교인 것처럼 가정하고 있다. 

 

이러한 가정의 기저에는 사도행전 13장에 나오는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에 파송했다고 하는 사실을 선교의 시발점으로 받아들이는 모종의 컨센서스에 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선교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13장의 파송이 진정한 선교의 출발점인지에 대해서 심각한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최근 들어 확대되어 가는 선교의 개념을 생각할 때 선교를 정의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아무리 복잡하고 세련된 표현을 사용한다고 해도 결국 “선교란 타문화에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 이를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대 전제 속에서 사도행전을 다시 본다면 선교는 13장에 나타나는 사도 바울과 바나바 이전에 이미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흩어진 사람들에 대한 새로운 조명

 

발제자는 성경에서 선교가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부분에 대한 새로운 조명으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사도행전 8장에서 스데반의 순교로 시작된 핍박을 피해서 사마리아로 간 사람들과 안디옥으로 간 사람들에 대한 언급은 선교라는 차원에서 다시 조명될 필요가 있다.

 

사도행전에서 두 번 나타나는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흩어진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8장 1절: “........ 흩어지니라.”

11장 19절: “..... 흩어진 사람들이”

 

이들 모두가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스데반의 죽음을 계기로 각지로 흩어진 것이다. 이들이 동일한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동일한 그룹에서 나왔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다른 대상을 상대로 복음을 전한 것을 비교하는 것은 흥미롭다. 

 

8장 5절에서 흩어진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빌립이라고 하는 7명의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한 이야기가 나온다. 5절과 12절에서 그는 그리스도를 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미 메시아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전한 것은 문화적으로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반면 11장 20절에서 안디옥의 헬라인에게 갔던 동일한 흩어진 사람들은 '주 예수'를 전파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주'란 헬라어로 ‘키리오스 (kyrious)인데 이 단어는 당시 헬라의 신들에게 사용되었던 경어였다. 에딘버러 대학에서 선교학을 가르쳤던 앤드류 월즈 교수는 이런 것을 ’상징 빼앗기 (symbol theft)‘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선교사들이 이교도 지역에 들어가서 이교도들이 사용하던 용어들을 가져다가 복음의 진리를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하면 이교도들에게 보다 친근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된다. 한국 교회에서 사용하는 기도도 절에서 사용하던 용어였고, 제사라는 용어도 유교에서 사용하던 용어였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복음을 전파하는 대상에 따라서 그들의 문화에 적절한 사역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들은 매우 타문화적인 사람들이면 이런 면에서 이들이 선교를 했다고 분명히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타문화 사역을 하기에 적절했다고 하는 것은 이들 대부분이 디아스포라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사도행전 2장에는 말씀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흩어졌다가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왔던 이들이었음을 말해주는 명확한 증거들이 있다. 그들은 외국 문화와 언어에 능통했을 것이며 다른 디아스포라에게 복음을 증거 하는 일에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7장의 스데반의 사건도 길리기아 출신의 교포들이 출석하는 회당에서 벌어진 일이며, 길리가아 다소 출신의 사울이 그곳에 있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들은 처음부처 예수님을 좇았던 제자들, 즉 갈릴리 사람들이라고 불리었던 그룹의 사람들과는 명백한 대조를 이룬다. 사도행전은 예수의 제자들을 갈릴리 사람이라고 두 번이나 지칭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선교운동이 8장과 11장처럼 흩어진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질 때까지 연기되었을까. 이것은 아마도 예루살렘 교회가 가지는 선교 사역적 제한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들은 여전히 태생적으로 타문화에 노출되기 쉽지 않았다. 따라서 주님께서 새로운 그룹을 통해서 복음을 이방에 전하는 준비를 하셨다고 보인다. 그것이 바로 디아스포라 그룹이다. 

 

이것은 8장과 11장에서 다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8장 14절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사마리아에 교회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낸다. 사마리아와 유대의 문화적 거리를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면이다. 10장과 11장 1절부터 18절에 나타나는 베드로의 고넬료 가정 방문 이야기는 예루살렘 교회의 이방인에 대한 이해를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11장 22절이다.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에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는 대신 바나바를 보내기로 한 것이다. 바나바는 사도행전 4장의 기록대로라면 그는 구브로에서 태어난 디아스포라이다. 그가 예루살렘으로부터 파송을 받아 안디옥에 갔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다고 고백한 것은 하나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만약 베드로와 요한이 갔었더라면 그런 보고가 달리 표현되었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그는 안디옥에 새로운 사역의 기회들이 생겼을 때 자신을 파송한 예루살렘 교회에 추가로 사역자를 보내달라고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다소 출신의 디아스포라 사울을 데려다가 사역을 함께 하게 된다. 

 

이들의 흔적은 사도행전 11장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들의 모습은 계속해서 18장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 20장에 가이사랴에서 계속 전도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던 빌립 집사, 21장의 오래된 제자 나손, 그리고 바울이 로마에 도착했을 때 삼관까지 나왔던 다른 형제들에 이르기까지 계속 되고 있다. 

 

3. 사도바울의 선교 사역의 특징

 

사도 바울의 선교 사역이 흩어진 자들과 현저히 다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사도행전 9장 15절을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울이 다메석에서 눈이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에게 바울에게 안수하도록 하신다. 그 때에 바울이 장차 할 일을 이야기 하는데, “ 내 이름을 이방인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하고 말한다. 

 

여기에 열거 된 세 그룹이 통일성을 가지는 그룹이 아님은 매우 명백하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종족적으로 말한 것이지만 임금들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며, 21장에서 바울이 체포되면서부터 그는 죄수의 신분으로 가이사를 포함해서 당시의 총독과 분봉왕들 앞에서 왜 자신이 죄수의 신분이 되었으면 가이사에게 상소한 내용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16장 37절과 22장 25절에서 두 번이나 자신이 로마의 시민권자임을 주장하는데, 사도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풀뿌리 선교가 아닌 매우 특별한 선교를 위한 조건임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도행전 19장 21절에서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갔다가 로마에 가겠다고 말했지만 그가 로마에 가려고 하는 것이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로마서에서도 그는 그것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사도행전 28장에 바울이 로마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곳의 형제들이 아삐아 저자와 삼관까기 마중을 나온 것을 보면 바울이 로마에 오기 전에 이미 복음은 전파되고 형제들의 공동체가 형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간 것이 전도와 선교를 위해서 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로마서 15장 20절에서 자신이 “다른 사람이 닦은 터 위에 건축을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 더욱 설득력이 있다. 

 

4. 세계 선교에 나타난 풀뿌리 유형과 바-바 유형

선교의 역사를 보아도 선교가 진행되는 모든 형태를 풀뿌리 유형과 바-바 유형으로 나누어서 볼 수 있다. 

일찍이 F. F. Bruce는 2세기 말 초대 영국 선교 사역에서 평신도의 활동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영국에 기독교가 전파된 것은 평범한 사람들 곧 고올 (Gaul) 지방에서 온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날마다 사업장을 통해서 선교의 역사를 이룰 수 있었다. 

풀뿌리의 유형은 모라비안 교도들이나 바젤 선교회 등의 모습에 잘 나타나 있다. 모라비안 교도들은 선교사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형태로 파송한다면 세계 선교를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의도적으로 직업을 가지고 생계 문제를 해결해 가면서 선교 사역을 감당하는 모델을 개발하고 이를 실천해 나갔다. 

1732년에서 1760년 사이에 무려 226명의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10여개 국으로 파송되었다.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세인트 크로이 섬, 수리남, 남아프리카, 북미, 자메이카, 엔티가 섬등으로 파송되어 나갔다. 그들은 에스키모인들과의 교역을 하여 남은 이익으로 선교 사역을 하기도 했다. 

모라비안 교도들은 후에 바젤 선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는데, 이들은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는 회사의 운영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여주면서 선교를 한 풀뿌리 선교 운동의 대표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오히려 식민지 국가의 교회들이 자국의 선교사들을 피식민지에 파송하는 형태의 선교가 진행되면서 풀뿌리 유형보다는 바-바 유형이 선교의 전형처럼 나타나게 되었다. 전형적인 선교사의 유형이 바-바 유형과 비슷한 것은 다음 도표에 잘 나타난다. 

 

II. 선교적 상황의 변화

 

오늘날은 바-바 유형과 풀뿌리 유형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효과적인가를 살펴보고 싶다. 이를 위해서 먼저 풀뿌리 유형이 가능했던 시대적 상황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 흩어진 사람들의 시대적 배경

 

성경은 흩어진 사람들의 사회적 배경을 알려주고 있는데, 그것은 로마가 지중해를 감싸는 대제국을 이루고 있는 때였다. 누가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가이사 아구스도 때라고 확인해 주고 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를 최대로 확장해 놓았던 율리우스 씨저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고, 후에 아구스도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양부가 확정해 놓은 로마를 50년의 치세 동안 잘 관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렇게 확정된 로마 제국은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 특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교통과 통신의 발달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서양의 격언이 말해 주듯이 로마 사람들은 세계 어느 곳을 정복하든 도로를 만들었다. 로마 사람들이 ‘도로’라고 부를 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걸어 다니거나 달구지가 지날 수 있는 정도의 일반 도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로마의 전차가 전속력을 달릴 수 있어야 하고 돌이나, 나무로 포장된 도로만을 로마 사람들은 도로라고 불렀다. 로마의 도로라고 하면 그 넓이가 10미터 정도 되었고 길가는 배수로가 있어 도로에 물이 고이지 않아야 했다. 

 

로마 사람들의 건축술은 대단했는데 만약 도로가 지나는 곳에 계곡이 있다면 돌로 웅장한 다리를 만들어 전차가 멈추거나 속력을 늦추지 않고 달릴 수 있도록 했다. 그런 다리에는 맑은 물이 흘러갈 수 있는 수로도 함께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다리를 수도교라고도 불렀다. 오늘날에도 이런 수도교의 흔적은 유럽 전역에 널려있다. 그러니 로마의 도로는 오늘날 고속도로와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도행전 28장에는 바울이 로마에 도착했을 때 압비아 가도로 지나갔음을 암시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도행전 28장에서 사도 바울 일행이 로마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압비오 광장에서 로마에 있던 믿는 형제들의 환영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압비오 광장이란 로마에서 남동쪽으로 약 70㎞ 지점, 압비오 가도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서 그곳은 여행객들이 숙박하면서 말을 바꾸어 타던 일종의 여행 경유지였다. 압비오 가도는 압비오라는 이름의 행정관이 로마에서 제일 처음으로 만든 도로다. 우리식으로 한다면 1번 고속도로인 경부고속도로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로의 발달은 통신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로마제국이 도로를 따라 만들어 놓은 역(驛)제도는 오늘날 우편제도에 해당하는 통신의 발달로 이어졌다. 역제도를 통해서 로마제국 안의 어느 곳에서도 로마까지 서신이 며칠 안에 오고 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이렇게 만들어 진 로마의 가도를 통해서 신속하게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었다.

 

(2) 문화와 언어적 통일

로마 사람들은 군사적으로는 강대했으나 문명적으로는 헬라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었다. 심지어 로마에서 고관들은 자기 자신의 자녀들에게 헬라어를 가르치기 위해 요즘 영어의 열기와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로마제국이 유럽을 제패하기 전 BC 330년 경 마게도니아에서 일어난 알렉산더 대왕이 동유럽의 상당부분과 아시아 지역을 통합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 건설은 아버지 필립 왕이 많은 지역에서 거둔 승리에 힘입었지만 아무리 아버지의 도움이 있었다고 해도 서른 살이 채 되지 않은 젊은 왕의 제국건립은 대단한 것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점령한 지역에는 헬레니즘이라고 하는 문화 양식의 통합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헬레니즘은 당시 그리스 문화와 동방 문화를 혼합하는 매우 독특한 문화를 이루었고 언어라는 면에서도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하는 단일 언어권을 형성하여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광역 문화권이 형성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제국은 얼마 가지 않아 없어졌지만 헬레니즘 문화권은 예수님 당시에도 그래도 지속되고 있었다.

 

로마는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나라였지만 문화적으로는 그리스의 문화를 많이 모방하였다. 건축이나 의학 등에서는 라틴어가 강세를 보였지만 문화와 철학 등의 분야에서는 라틴어보다 헬라어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로마제국 내에서 헬라어를 배우려는 열기가 대단하였고, 공식적으로 헬라어를 사용하는 지역이 로마의 영토 내에 상당수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220년 전에 하나님께서 매우 놀라운 일을 한 가지 더 준비해 두셨다. 유대인들의 경전인 구약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된 것이다. 당시 이집트를 다스리고 있던 프톨레미 왕조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라고 하는 도시에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도서관을 세워 세상에 있는 훌륭한 문서들을 모으겠다는 거창한 프로젝트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곳에 보관하고 싶었던 책 가운데 하나가 유대인들이 읽는 성경이었다. 물론 당시의 성경은 구약만을 말한다. 당시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어서 히브리어를 읽을 줄 아는 유대인들이 아니라면 성경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프톨레미 왕조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스라엘에서는 72명의 장로를 보내어 번역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70인역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읽었겠지만 히브리어를 잘 모르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나, 이방인이지만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들, 그리고 유대교에 관심은 있으나 할례를 받지 않고 그저 회당 주위를 맴돌던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은 헬라어로 된 성경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었다. 

 

더욱이 사도들이 교회에 보낸 편지나 그 후에 등장하게 되는 복음서 등 초대교회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신약 성경은 모두 헬라어로 기록되었고, 이 성경들은 헬라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번역 없이 신속하게 읽힐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은 신약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이 아티카 헬라어가 아닌 코이네 헬라어로 자신들의 글을 기록했다는 점이다. 아티카 헬라어란 학문에 어울리는 매우 고상한 언어였고 코이네 헬라어란 시장에서 사용하는 언어였다. 그런데 신약 성경은 아주 쉬운 일상의 용어인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어서 누구든지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었다. 

 

(3) 팩스 로마나

로마 제국 내에서는 어디나 여행을 위한 안전이 보장되어 있었다. 로마는 막강한 군사력을 이용하여 제국 안에 있는 모든 영토에서 자국민들이 자유로운 왕래를 할 수 있도록 안보를 최우선으로 했다. 로마 제국을 명실상부한 제국으로 만들어 놓은 율리우스 시저가 젊었을 때만 해도 이탈리아 반도를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가는 여행은 위험한 일이었다. 시저가 젊은 시절 군대에 들어가 복무를 하고 있을 때 바다를 항해하다가 해적들에게 잡힌 적이 있었을 만큼 당시 육로나 해상 여행은 대단히 위험했다. 

 

그러나 로마의 초대 황제였던 가이사 아구스도 때에 이르러서는 로마 제국 내에서 사람들은 안전하게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육상에서 행인들을 괴롭히던 산적들도 모두 소탕되었고, 율리우스 시저를 잡은 적이 있었던 해적들도 제국 안에서는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었다. 로마제국이 쇠락해지기 시작하는 AD 400년경에 들어서는 로마제국 도처에 도둑들이 나타나 다시 자유로운 이동을 막았지만 적어도 로마제국 전성기에는 어디서나 매우 안전한 여행이 보장되었다. 

로마제국처럼 넓은 지역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던 때는 아마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안전한 상황에서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제국 안을 자유롭게 여행하며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었다. 오늘날 많은 곳에서 여전히 분쟁이 있지만 오늘날처럼 자유롭게 세계를 여행할 수 있었던 때도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선교의 위대한 세기

 

지난 18세기 말부터 시작된 개신교 선교에 있어서의 황금기는 식민지 개척을 통한 제 2의 로마시대와 같은 상황이 전개되면서 식민지 국가의 선교사들이 주로 피식민지를 향해 나갔다. 항해술이 발달하여 선원들은 근해를 벗어나 원근해로 심지어는 대륙을 넘나드는 항해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것은 육로의 통행이 주는 번거로움이나 방해 (예를 들어 이슬람 제국을 통과해야 하는 어려움 등)를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지리적 발견 또한 주로 유럽,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로 국한된 세계를 넓혀 주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아메리카와 호주 등에 대해서 새로운 세계를 이해하게 해 주었다. 허드슨 테일러가 영국을 출발해서 중국 상해에 도착하는데 163일이 걸렸다. 지금은 영국에서 비행기를 타면 상해까지 13시간밖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반 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며 선교지에 가는 것이 매우 긴 시간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하게 빨라진 여행으로 평가받았다. 

 

의학적인 진보도 항해에서 발생하는 병들에 대한 치료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위생환경을 개선시켜줌으로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구한말 조선에서도 고종 황제는 미국 교회들에게 의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새로운 서구식 교육 또한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이 환영을 받는 좋은 이유가 되었다. 우리나라만 해도 서구 선교사들이 중학교와 대학교를 설립하면서 새로운 서구식 교육을 정착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바 있다. 

 

3. 더 위대한 21세기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피식민지들이 독립하면서 선교사들의 진입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랄프 윈터 박사는 이런 상황을 “믿을 수 없는 25년 (1945-1969) 사이에 서구 여러 나라들은 비서구 세계의 5%를 제외한 모든 나라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버렸다. 20세기 후반부에 수십 개의 나라가 독립을 선언하고, 정부를 수립했으며, 유엔에 가입했다. 이들 대부분의 지역에서 선교사들은 더 이상 우월한 지위에서 사역하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라고 표현했다. 

 

CAN(Creative Access Nations) 지역은 물론이고 선교사 비자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OAN(Open Access Nations) 지역에서조차 선교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하지만 초대교회의 흩어진 사람들처럼 전형적인 선교사가 아닌 형태로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의 폭은 더 커지고 있다. 이제 20세기 후반이 되면서 선교의 상황은 매우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인류에 공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교통과 통신의 발달이다. 1853년에 허드슨 테일러가 영국에서 중국으로 여행할 때 선박 여행의 경우 6개월이 걸렸다. 최근 들어 통신의 속도는 2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을 만큼 빠르게 발달하고 있다. 문화적으로도 같은 영화, 같은 음악을 사람들이 감상하고 있다. 분쟁지역을 제외한 몇 나라를 제외하면 세계를 여행하는 것은 거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로마 전, 로마, 18세기 이전까지의 중간 시기, 선교의 위대한 세기라고 불리는 18, 19세기, 그리고 현재를 비교해 보았다. 

 

오늘날 세계화로 인하여 세상은 급속도로 좁아지고 있다. 이제 여행이라고 하는 것은 40, 50년 전에 비하면 국내에서 여행을 하는 것보다 조금 더 비싸고, 조금 더 노력을 요하는 일 정도로 생각된다.

 

4. 시대적 요청

 

우선 상당히 많은 선교지에 선교사들이 더 이상 쉽게 입국할 수 없게 되었다. 몇 십 년 전에도 선교지가 선교사를 환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당시에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들이 세계열강이라고 할 수 있는 나라들이었다. (예를 들어 영국, 독일, 미국 등의 식민 지배를 하던 나라들이었다.) 그리하여 피선교지 정부가 선교사의 자국 체류를 싫어해도 선교사를 쫓아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많은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의 정부가 무서워서 선교사를 쫓아내지 못하거나 선교사에게 비자를 주는 나라는 한 군데도 없다. 하지만 자국의 필요를 채우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문이 열려 있다. 

 

Y 선교회는 오랫동안 공산주의 정부의 통제로 선교에 대해서 문을 닫고 있던 J국에서 20년 전 사역을 하기 시작했다. 선교부 대표인 T 선교사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그 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택하기보다 정공법을 택하기로 했다. T 선교사는 자신이 알고 있던 네트워크를 통해 우선 그 나라 정부 고위 간부들과 대화를 하면서 자신의 선교회가 J 국을 위해서 어떤 일을 도와주기를 원하는 지 물어 보았다. 당 고위 간부들은 시골로 들어가서 그곳 사람들을 진료 할 의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물론 J 국에도 의사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그 의사 대부분은 도심에서 진료를 하려고 하지 시골까지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 것이 사회적인 문제였다. 

 

J 국에 의사를 보내달라는 부탁을 받은 Y 선교회는 미국과 영국 등에서 의사를 발굴하여 파송하게 되었다. 장기적으로 헌신한 의사보다는 일 년에 3주에서 4주 정도의 휴가를 J국의 한적한 시골 지역에서 보내면서 그곳 사람들에게 의술을 베풀 의사들을 계속해서 파송해 몇 개의 클리닉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나라에서는 선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NGO로 등록을 하였다. 이들은 J국 의사들도 들어가기 꺼려하는 외지에 들어가서 가난하고 소외 된 사람들에게 사랑을 보여 주었다. 이를 지켜 본 공산당 간부들은 Y 선교회에 다시 영어를 가르칠 사람들을 보내달라고 부탁을 했다. Y 선교회는 영어를 가르칠 사람들을 구해서 보냈는데 이들도 헌신적으로 영어를 가르치며 현지 사람들을 섬겼다. 이들이 영어를 가르치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증거 할 수 있는 기회는 많았다.

 

얼마 후 T 선교사의 아들이 J 국의 매우 큰 도시의 한 대학을 방문했다. 그가 방문한 것은 혹시 영어 선생을 그 학교에 보낼 수 있을까를 타진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 학교를 방문할 때 영어 교사를 그 학교에서 가르치게 하는 가능성에 대해서 매우 회의적이었다. 왜냐하면 그 학교는 공산 간부들을 교육하는 학교이기 때문이었다. 총장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 선교사는 자신의 단체에 영어를 가르칠 사람들이 있는데, 혹시 학교에서 그런 사람들이 필요한 지를 물었다. 이야기를 듣던 총장이 갑자기 “당신네 조직이 보내려는 사람이 모두 크리스쳔입니까?”하고 물었다. 이런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기대하지 못했던 선교사에게는 무척 당황스러운 순간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잠시 머뭇거리다 그 선교사는 정직하게 대답을 했다. “네, 그렇습니다. 모두 크리스쳔입니다.” 그 말을 들은 총장은 “꼭 크리스쳔들만 보내주십시오.” 하고 당부를 했다고 한다. 그 동안 그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칠 원어민들을 뽑았었다. 학교는 혹시 크리스쳔 원어민들이 후에 공산당 간부가 될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믿지 않는 사람들을 뽑았다. 하지만 불신자들도 대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영향도 매우 나쁜 영향들이다. 마약도 하고, 성적으로 부도덕한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총장은 이런 일을 매우 염려하고 있던 터에 좋은 소문을 들은 단체에서 영어 선생을 보내주겠다고 하니 확인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슬람 국가들이나 여전히 공산 정부가 있는 나라에서는 선교사라고 하는 신분으로 입국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지역을 창의적 접근지역이라 부른다. 하지만 설령 우리가 개방된 나라라고 부르는 일본, 태국, 대만 같은 곳에서도 사실 상황은 그렇게 다르지 않다. 그런 나라에 들어갈 때 선교사 비자를 받아 가기는 하지만 100년 전처럼 혹은 50년 전처럼 선교사라고 하는 외국인에게 현지인들은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런 개방된 지역에서 선교사들은 다시 현지인들과의 새로운 접촉점을 마련하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만 한다. 태국이나 일본 같은 지역에서 교회를 개척한다 해도 사람들을 모으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전도 이전에 태권도를 가르친다든지, 기타를 가르친다든지, 영어를 가르친다든지, 혹은 한국 요리를 가르치면서 접촉점을 만들려고 애쓴다. 

 

또한 전통적인 선교사는 선교지에 갈 때 일반적으로 매우 높은 비용의 지출을 전제로 한다. 선교본부를 운영해야 하고, 여러 가지 멤버 케어를 위해서 들어가는 비용을 포함하면 선교사들이 모금하는 액수는 높아지게 된다. 이런 재정적 운영 형태가 되어서는 한정된 숫자의 선교사 밖에는 파송하기가 어렵다. 한국 교회가 2만 명의 선교를 위해서 지출하는 비용이 줄잡아 연간 5억불 가량 된다. 이런 상황에서 선교사를 추가로 더 파송하는 것은 그만큼 한국 교회의 재정적 부담을 더 증가시키는 것이다.

 

물론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가 모두 자비량 선교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평신도 전문인의 경우는 적어도 전통적인 선교사에 비해서 재정의 전부 또는 일부를 벌면서 할 수 있는 가능성은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전통적인 선교방식이 아닌 평신도 전문인의 경우 스스로가 재원을 조달함으로 파송 교회의 재정적 부담을 줄여 줄 수 있다.

 

필자가 인도네시아에서 교수 사역을 할 때 한 세미나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그 세미나에서는 인도네시아에 어떻게 이슬람이 전파될 수 있었는가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었다. 세 가지 강력한 가설이 있었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아라비아의 상인들이 이슬람 신앙을 가지고 왔을 것이다.

둘째, 인도의 상인들이 이슬람 신앙을 가지고 왔을 것이다.

셋째, 중국의 상인들이 이슬람 신앙을 가지고 왔을 것이다.

 

필자에게 가장 충격적인 것은 이 세 가지 가설 속에 나타난 공통점이었다. 이들이 모두 상인들이라고 하는 점이다. 이러한 이슬람의 선교의 모델이야말로 사도행전에 나타난 풀뿌리 선교의 모습이 아닌가. 이제 이슬람은 성경에 나타난 모습으로 효과적인 선교를 하는 반면 기독교는 오히려 선교에 있어서 벽에 머리를 박고 있는 형상으로 비쳐진다. 

 

나가는 말

 

한국 교회들이 그 동안 가지고 있었던 선교사 중심의 선교에서 흩어진 사람들 즉 풀뿌리로 선교가 그 운동력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1) 모든 선교지역을 창의적 접근 지역으로 보아야 한다. 창의적 접근 지역에 진입할 때는 물론 더 조심을 해야 하지만 개방된 지역이라고 하더라도 종교다원주의 등의 영향으로 기독교의 고자세적인 태도에 대해서 냉담하거나 심지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선교사가 큰 소리 치며 다니는 시대는 지나갔다는 인식을 빨리 해야 한다. 

(2) 모든 성도들이 선교사로 준비되어야 한다. 평신도 전문인으로서 선교지에 가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본국에 있을 때 자신이 선교사로 사는 것은 더 중요하다. 중국 내지 선교회를 창설하여 중국 선교에 큰 기여를 한 허드슨 테일러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선교지에 간다고 해서 선교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만약 자기의 본국에서 선교사가 아니라면 배를 타고 간다고 해서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선교지에 가서 직업을 통해 선교를 하려는 비전이 있는 사람이 본국에서 그런 직업을 가져 보지 않았다면 그곳에서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역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설령 본국에서 익숙한 직업을 선교지에서 그대로 할 수 있다고 해도 그가 직업을 가지고 본국에서 사역을 경험한 적이 없다면 그는 선교지에서 사역을 통한 열매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적어도 본국에서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어떤 형태로든 사역을 감당하는 훈련이 전제되어야 한다.

(3) 약함으로부터의 선교를 배워야 한다. 선교는 강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흩어진 성도들처럼 연약한 상태에서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4) 새롭게 주어진 기회를 잡아라. 두 가지 새로운 기회를 주님이 우리에게 열어 주고 계시는데, 하나는 800만에 달하는 한국 디아스포라를 통한 선교이며, 또 하나는 100만이 넘는 이주 노동자들에게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5) 바-바 유형의 선교는 지속되어야 한다. 

     104. 설악포럼 2015-6: 어떤 선교사를 보낼 것인가? - 풀뿌리 선교 모델 (손창남, OMF)
     102. 설악포럼 2015-4: 선교적 교회의 이해와 실천 (한철호, 미션파트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