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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포럼 2015-4: 선교적 교회의 이해와 실천 (한철호, 미션파트너스) 프린트   
류재중  Email [2016-12-09 09:25:51]  HIT : 160  

선교적 교회의 이해와 실천

한철호, 미션파트너스

 

I. 선교적교회 

설악포럼에서 선교적 교회를 논의하게 된 배경은 선교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자는 포럼의 취지와 관련이 있다. 변화하는 21세기의 세계 선교환경 속에서 이제까지 선교를 주도했던 서구선교의 틀을 뒤돌아보고, 성경과 시대가 요구하는 한국선교의 미래를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한국선교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선교모델을 찾기 위한 다양한 논의는 결국 선교의 주체로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의 정체성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즉 선교와 교회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교회론의 문제다.  이는 오늘날 등장하는 비서구교회선교의 과제가 단순히 교회 중심세력이 서구에서 비서구로 바뀌는 것에 대한 우리의 대응 정도가 아니라, 교회의 본질 회복이 핵심이 되어야 하고 본질 회복의 결과가 타문화권 선교에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선교와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등에 대한 논의는  역사 안에서 계속되어 왔다.  최근  서구 교회들이 후기 크리스천덤(Post Christendom)에 존재하는 교회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해 평가하고 대안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서 교회의 본질과 선교와의 관계 논의가 다시 촉발됐다.  

근대선교운동의 아쉬움은 교회와 선교가 존재론적으로 서로 상관없이 선교가 교회 활동의 하나로 이해되고 발전되어 온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크리스천덤(Christendom)시대 서구 교회의 선교는 교회안에서 발전되어 온 신조와 신앙고백을 확산하는 하나의 활동으로 이해되는 측면이 강했다. 따라서 선교가 교회의 본질과 관련된 것이라기 보다는 교회가 해야하는 의무나 명령으로 주어졌다. 그리고 이 의무를 완수하기 위해 선교 수단이 발전하게 되었다. 그 결과 선교라는 수단 자체가 목적이 되고, 교회와 선교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DNA를 가진다는 생각이 단절 되었다.  

선교가 교회의  본질이 아니라 수단이 된 상황에서, 오늘날 서구 교회가 점차로 그 힘을 잃어가고, 그 결과로 선교의 참여 또한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현상이 한국교회 안에서도 발견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성장하고 있는 비서구 교회들은 점차로  선교 참여를 가속화하고 있는데, 과연  그들의 선교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라는 질문이 생기고 있다.  

선교적 교회 논의가 최근 서구 교회에서 다시 확산 된 것은 좁은 의미에서 교회가 해외선교를 어떻게 잘 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까지 기독교국가였던 서구 사회에서 오늘날 기독교는 단지 명목적 형식이고, 기독교는 더 이상 서구 사회에서 중심부에 있지 않으며 주변부로 밀려나와 서구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을 상실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 문제에 대한 반성과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선교적 교회 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동시에 이러한 논의는 타문화권 선교에도 적용되기 때문에 타문화권선교의 변화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선교적교회 논의가 핵심 주제로 등장한 것이다. 

성경적이며 동시에 오늘날의 상황에 적합한 선교 모델을 찾아내는 방법은, 결국 성경이 하나님과 교회 그리고 선교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 가와 그것을 이 세상에서 실현해 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어떻게 정의하는 가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고 적용될 수 밖에 없다. 

최근 선교적교회 논의가 상당히 광범위한 범위에서 다양한 각도로 논의되고 있다. 현재 논의되는 모든 논의를 다 담아 낼 수는 없고, 본 글에서는 선교적교회 논의가 타문화권 선교를 이해하는 데 어떻게 반영되어야 하는가를 중심으로 논하고자 한다. 선교적교회론 전반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는 지난 수년 간의 선교적교회 논의를 잘 정리해 놓은 크레이그 벤 겔더의 <선교적 교회론의 동향과 발전>을 참조하면 된다 

본 글에서는 두 가지 방향을 취한다.  첫째, 선교적교회에 대한 총괄적 이해이다. 이를 위해서 선교적교회 논의가 가지는 성경적 고찰과 교회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  역사적 고찰이 필요하다. 두 번째 , 선교적 교회를 위한 선교적 성경읽기에 대한 실제적인 예와 선교적 교회를 위한 로드맵에 대한 실천적 모델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선교적교회론의 논의 범위가 광범위하고 또 다양한 측면에서의 논의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본 글에서는 선교적 교회론이 가지는 총론적인 의미를 간략하게 정의하고, 그 정의 내에서 선교적교회론이 타문화권선교를 이해하는데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를 선교적 성경읽기의 예와 선교적 교회 만들기를 위한 로드맵을 중심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II. 선교적 교회의 이해

1. 성경적 이해

교회의 본질이 선교적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그들로 구성된 공동체에게 어떤 정체성을 부여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공동체라는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첫 공동체는 이스라엘백성이다.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면, 그들은 처음부터 보내심을 받은 존재로(창12;1-3, 출19;5-6) 그 신분과 소명과 수준을 가진 공동체이고(출19;4-6), 이를 그들의 역사를 통해서 살아냈던 공동체이다(시67). 또한  그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약적 표현인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인 신약교회는 이 신분과 소명과 수준을 그대로 이어 받은 존재이다(벧전2:9).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 공동체가 보내심을 받기 이전에 하나님 스스로가 자신을 세상에 보내시고(요1:14), 세상에 보내어진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또 그의 제자 공동체인 교회를 세상에 보내신다(요17;18, 21;21). 따라서 하나님 스스로가 보내시는 분이신 동시에 보내심을 받은 존재인 것처럼, 그의 백성 또한 보내심을 받은 존재이며 보내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성경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선교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신다. 선교는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고 사역이며, 그의 백성들이 참여하길 원하시는 일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단지 몇 개의 성경 구절에서만 선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28;19-20, 행1;8, 마24;14 등 몇몇 성경 구절만을 가지고 선교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매우 부족하며 선교의 전체적인 그림을 가질 수 없게 된다. 더 나아가서 선교에 대한 오해를 낳게도 한다. 우리는 창세기로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전체에서 선교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확인 할 수 있어야 한다 . 

창세기는 그 첫 장에서 하나님을 창조주이시면 전 우주적인 분으로 소개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복을 베푸시고 복을 받은 받은 세상과 사람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경배하도록 이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계시하신다. 창세기는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에 대한 반역으로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고,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갔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성경은 창 12장에 들어서면서 그러한 인간과 온 세상을 다시 복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시작됨을 선언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부르시고 그와 그의 후손을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시겠다고 하신다. 모세오경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삶을 현실 세상 속에서 살아야하는 가에 대한 세부적인 기준이 제공되고 있다. 이어지는 역사서에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열방을 구원하시기 위한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선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나라와 그 백성들의 삶을 통해  어떻게 자신의 약속을 이루어가시는 가를 보여준다. 시편은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 열방 가운데 나타난 그 분의 영광을 찬양하는 노래이다. 그 구원이 모든 열방 가운데 선포되어야 하며, 모든 열방은 그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해야 함을 노래하고 있다. 이어지는 선지서에는 크게 두 가지를 말하고 있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모든 열방을 복 주시고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도가 이스라엘의 죄악과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말미암아  지연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예언한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은 망하지만 온 땅이 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게 된다는 하나님의 목적이 결국 이루어 질 것이라는 약속을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해 주고 있다.

신약의 복음서는 온 땅에서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시기 약속하신 메시야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인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심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마1;1).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삶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선포하시는 사역을 기록하고 있다.  메시아 예수께서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게 하심으로 온 인류가 영생하는 복의 길을 허락하셨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복음의 메시지를 모든 족속에게 가서 전하라고 명령하신다. 

사도행전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수행하는 예수의 제자들의 사역이 성령님의 강림하심으로부터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선포되어가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특별히 서신서에서는 이방 땅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름 받은 사도바울 뿐만아니라 흩어진 성도들이 전 로마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과정이 소개되어 있다.  서신서들은 흩어진 초대교회 성도들의 헌신으로 복음이 온 땅으로 확산되어 가는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이 된 성도들이 모든 민족과 족속과 열방과 방언 가운데로부터 나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 찬양과 경배와 영광을 돌리는 역사가 일어남으로서 온 세상을 구원하시고 복 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된다는 요한 계시록의 기록으로(계7:9-10) 마무리 된다. 이렇게 성경은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인해서 온 땅이 하나님께 예배와 영광을 돌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성취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이 세상에 자신을 스스로 보내시고(요1:1-14), 하나님의 모든 권세를 가진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또 그의 백성들을 이 세상으로 보내신다(요17:18, 20;21)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성경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스스로를 세상에 보내시는 분이시며, 그 분을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 된 교회를 또 세상에 보내시는 분도 바로 하나님이시다. 바로 하나님의 선교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그의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도 선교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2. 선교적 교회의 신학적, 역사적 이해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세상에 보내시고 보내심을 받은 자가 되심으로 이 세상을 향한 자신의 목적으로 성취해 가는 것을 역사 속에서 신학자들은 미시오 데이(Missio Dei) 즉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으로 소개해 왔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세상에 보내시고 그 목적을 이루신다는 생각은 계몽주의시대를 거치면서 처음 교회가 확인하고 믿게 된 삼위일체 신학이 불편하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삼위로 존재하시면 활동하신다는 생각이 서구 현대 세계관에 의해 형성된 계몽주의적 신학 흐름에서 점점 그 타당성을 잃어버렸었다.  더우기 종교개혁과정을 거치면서 개신교의 신학이 기독교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성자의 신적 위치를 확보하는 일을 강화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었지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공동체적으로 존재하시며 스스로 보내시는 분이심의 생각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이 그 자리를 찾지 못했다. 

 

이러한 20세기 초반까지의 서구 흐름에 변화를 일으킨 것이 칼 바르트의 생각이었다. 바르트는 서방 교회가 가져왔던 삼위일체 전통으로 되돌아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선교의 원래적 의미인 보내심의 원리를 다시 끄집에 낸 것이다. 바르트는 미시오(missio)는 초대 교회에서부터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단어는  신적 자기파송을 지칭하는 말로, 성부께서 성자와 성령을 세상으로 보내심을 표현하는 말이었다는 것이다. 즉 선교의 출발점은 교회의 어떤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시며 교회는 오히려 하나님의 선교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 후 선교신학은 선교를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해 가기 시작했고, 이러한 생각은 그 이후 네슬리 뉴비긴의 생각을 담은 책들을 통해서도 확산되었다.  

 

한편 이러한 선교신학의 발전은 20세기 후반 이어지는 WCC대회를 거치면서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세상에 보내시는데, 이 말의 의미는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직접 세상에서 그의 사역을 행하시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세상으로 보내신 교회를 통해서 그 사역을 행하시는 가의 문제에 대한 의견 차이로 이어져 갔다.  한쪽에서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세상이 직접 관련하시므로,  하나님 나라의 목표가 하나님께서 세속사에 직접 관여하는 과정을 통해 성취되는 점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선교는 결국 인간화(Humanization)가 목표가 되어 버리는 한계를 낳게 되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교를 성취하시다는 시각이다.  이는 교회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 간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서 선교는 교회에게 주어진 교회의 활동 혹은 비서구지역에 가서 서구교회를 그대로 심고 확장해 가는 것으로 제한되는 한계를 낳게 되었다. 

 

한편 최근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가던 두 흐름에 대한 새로운 통합적 고찰이 일어나면서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n dei)라는 본래적 의미를 되찾음과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가 이 하나님의 선교의 본질을 소유할 때 진정한 의미에서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존재로서의 그 역할과 활동에 참여 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더 확인해 가는 생각으로 발전했다. 

 

이런 과정에서 새로운 성경 해석 공동체들이 등장하면서 성경을 이해하는 틀을 하나님의 선교라는 관점에서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로운 선교학적 접근이 일어나게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데이빗 보쉬(David Bosch)이다. 보쉬가 1991년에 <변화하는 선교>(Transforming Mission)을 출판하면서 선교적 성경해석의 물꼬가 트이게 되었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네슬리 뉴비긴 또한 이러한 생각을 확장해 갔다. 뉴비긴은  선교와 교회 본질이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10년 에디버런대회가 선교대회로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교회가 가진  교회 중심 구조의 영향으로 그 동안 분리되었던 국제선교협의회(IMC)와 세계교회협의회(WCC) 조직을 다시 하나로 통합하였다.  선교가 교회의 본질적 부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실천한 것은 의미 있는 시도였다. 그러나 그 결과 오히려 선교가 교회의 본질적 위치를 회복하기 보다는 선교의 개념이 포괄적으로 변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에 대해 타문화해외선교에 관심이 많았던 복음주의자들이 이 흐름에서 이탈하면서 전 세계의 모든 교회가 참여하는 선교적 변화를 이끌어 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의 흐름들은 오늘날 교회들이 선교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하나님 스스로 선교적 존재인 것처럼 교회들도 스스로가 먼저 선교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해 가는 변화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네슬리 뉴비긴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활동을 모든 피조물 안에서 하나님의 선교에 온전히 참여하기 위해 성령을 통해 교회를 부르시고 그 교회를 세상으로 보내시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뉴비긴은 그의 책 “교회란 무엇인가” 에서 교회를 믿음을 고백하는 이들이 성례에 참여하는 통일성과 연속성을 가진 가시적 공동체로 보았다.  그는 교회의 하나됨은 단순히 이념적이거나 영적인 것에 불과하지 않고 가시적이고 사회적이며 유기적이다라고 보았다. 즉 교회의 본질은 분열되지 않은 연속적인 친교에 있다고 보았다. 뉴비긴은 교회를 연합적이고 동시에 성령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공동체로 정의한다.  동시에  뉴비긴이 주장한 교회의 본질은 사도적 신앙을 보유하고 세상을 향해 사도적인 선교 사역을 수행하는 사도적 교회가 되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다. 따라서 교회는 종말론적 관점에서 보아야 제대로 이해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은 사도적 교회(apostolic Church = missional church) 가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도록 주어진 시간이다. 그가 말한 참된 종말론적 관점의 함의는 선교 사명에 대한 순종이다. 만물의 최종적인 완성에 대한 소망과 이것이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즉 재림을 통해서 이루어 진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주어진 시간 안에 이루어지기 위해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사 증인되겠다고 하신 약속이 성취되는 것이고 이것을 위해 교회는 증인으로 부름받은 사명을 가지는 것이 교회의 사도직이다. 교회의 존재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재림이 완성되는 일이 존재 목적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즉 교회가 이러한 선교적 정체성을 일어버리면 교회는 존재해야 하는본질을 상실하게 된다고 뉴비긴은 경고한다.  

즉 교회의 선교적 본질을 이해하는 뉴비긴의 접근 방법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재 양식에 근거한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은 ‘보내시는 하나님’(missio Dei)이시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 즉 교회를 보내셨다(요 17:18; 20:21). 교회는 그러므로 “보냄을 받은 존재”이고 본질상 선교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교회는 그 본질인 하나님의 선교를 재발견하려는 노력을 통해, 연합을 파괴하고 복음의 통전성을 왜곡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 문화를 변혁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 제안이다. 뉴비긴에게 기독교는 이론과 실천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복음이 사회와 문화 한복판에서 개인적인 가치의 차원을 넘어 공적인 진리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뉴비긴이 말하는 선교적 교회론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로, 말씀과 행위 그리고 복음 선포와 사회적 관심이 통합된 통전적 교회론이다.  

따라서 선교적 교회 개념의 핵심은 교회는 만민과 만물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여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기 위해 이 세상에서 부름을 받고 이 세상 속으로 보냄을 받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라는 것이다.  

한편 1998년 선교적교회(Missional Church)가 출판되면서 선교적교회 개념이 다시 확장된  이후 선교적(missional)이란 단어는 거의 대부분의 기독교 활동과 주제를 들어내는 형용사로 사용되면서 처음 제안자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 의미와 해석이 다양한 방향으로  증폭되어갔다.  이러한 현상은 첫 제안자들이 이 단어를 사용하는 범위를 제한하지 않고 포괄적으로 사용했던 한계로 인해 발생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기독교의 본질이 선교적 혹은 보내심을 받은 것과 관련되어 있기 떄문에 그 의미의 적용이 광범위하게 일어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선교적교회를 논의할 때 이것은 또 다른  전도프로그램, 새로운 해외선교방식,  또 다란 교회성장 방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혹은 이것은 실용적 접근에서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방식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차세대 방식이나  포스터모던 방식 혹은 반 전통적인 교회 형태를 찾아가자는 것도 아니다.  

 

선교적교회 논의의 핵심은 교회의 선교적 활동보다는 오히려 교회의 존재 양식에 관련된 문제다.  일반적으로 서구의 경우 선교적교회의 논의는 후기 기독교 사회 안에서의 성육신 사역(개인주의적 탈기독교 문화적 문화에 대한 대응)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측면이 강하고,  비서구의 경우는 하나님 나라 복음의 소개/확장을 교회들이 어떻게 본질적으로 감당할 것인가에 관한 논의로 적용되고 있다. 결국 교회는 이 두 가지 측면을 다 수용할 수 있어야 진정한 의미에서 선교적 교회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3.  선교적 교회 논의의  적용

첫째,  선교적 교회는 교회에게 성육신적 태도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비어 우리에게로 다가오셔서 우리의 짐을 지신 것처럼(빌2;1) 우리도 스스로를 비어 세상으로 다가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사역을 모방하는 것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지금도 세상 가운데서 주인공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겸손하게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문화 안에 선교적(보내심을 받은 태도를 가진) 성육신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안으로 성육신적 태도로 들어가서 세상의 짐을 지는 겸손하면서도 창조적인 활동을 함으로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많은 경우 교회와 선교사들이 선교지를 복음으로 정복해야 한다는 등의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복음이란 말과 정복이라는 말은 결코 함께 할 수 없다. 복음은 결코 상대를 정복하는것이 아니다. 오히려 복음은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무장해제하시고 세상에게 짓밟핌을 당하시면서까지 그들과 함께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둘째, 선교적 교회는 교회에게 선교적 열정을 요구한다. 여기서 말하는 열정은 단지 교회 조직을 향한 열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가 세상과 이웃에 대해 깊이 공감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열정을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이웃과 가까운 관계를 가져야 한다. 일방적으로 베푸는 위치가 아니라 상호 관계 속에서 서로에 대해서 공감하고 듣기 시작할 때 진정한 열정을 생기게 된다. 교회가 선교 대상자들의 상황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무엇을 해 주려는 열정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열정을 말한다.  선교 대상자들에게 성급하게 무엇을 해 주려는 열정은 결국 뿌리 내리지 못하는 선교행위만를 양산한다. 

 

교회나 선교사 자신은 그들 가운데로 성육신적으로 들어가지 않으면서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 부담감 내지는 의무감 혹은 정의감이 많은 선교프로그램을 양산하고, 그것을 성취하려는 성취의 욕심이 선교적 열정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나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자기 성취의 열정 때문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자발적으로 인간의 연약함 안으로 들어오셨고, 그 연약함의 절망을 몸소 경험하시고,  그리고 그 절망에서 인간들을 구해 내신 열정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열정이 선교적 교회 안에서 재생산되어야 한다. 

 

세째,  선교적 교회는 교회에게 화해와 하나됨을 요구한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 분 안에서 삼위가 스스로 하나되고 공존하시는것처럼,  선교적 교회와 그 구성원들은 다양한 그들 안에서 스스로 하나되고 공존하기 위해 서로 화해해야 한다. 이러한 화해와 하나됨은 선교지의 교회들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나야 한다. 

 

크리스천덤 기독교국가시대와 식민패권주의 유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던 이제까지의 서구 중심의 선교는 비서구의 선교지에 대해서 일방적이고 훈계적인 태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비서구교회의 놀라운 성장으로 말미암아 이제 세계 교회는 과거처럼,  서구에서 비서구로, 혹은 1세계에서 2/3세계로와 같이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곳에서 모든 곳으로(from everywhere to everywhere) 흘러가는 공존과 하나됨의 시대에 이르게 됐다. 이제는 더 이상 선교국과 선교지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온 세계의 교회가 온 세상을 향해 선교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런 시대에서 일어나야 할 진정한 선교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선교에 참께 참여하기 위해서  교회와 교회 사이, 민족과  계층과 문화사이에 화해와 하나됨을 요구한다.

 

네째,  선교적 교회는 교회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도적 활동에 대한 순종을 요구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세상에 보여 주셨던 주도적 활동은 스스로를 보내시는 일이시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따르는 백성들의 공공체인 교회도 스스로 보내는 역할을 해야한다. 교회가 스스로를 보낸다는 것은 선교적 존재가 되는 일에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선교적 삶은 자신의 경계선을 넘어가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경계선은 지리적, 문화적, 상황적, 심리적 모든 경계선이다. 스스로를 보낸다는 말은 자신의 영역 안에 안주하거나 현재의 것을 고집하거나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내려놓고, 내어주며,  자신의 경계선 넘어로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경계선 넘어의 상황, 사람, 문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경계선을 허물고 넘어가라는 요구에 반응하여 순종하기 위해 치뤄야할 댓가가 있다면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III. 선교적 교회의 실천

 

선교적 교회로 변화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두가지 구체적인 실천의 예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이미 언급한 선교적 성경읽기의 실천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실천이다. 전통적인 구원론 중심의 성경읽기가 가지는 놀라운 측면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성경을 하나님 중심으로 보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성경은 인간이 구원받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으로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목적과 영광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간구원도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과정이다. 따라서 하나님 중심의 성경읽기 즉 선교적 성경읽기가 회복되어야 한다. 선교적 성경읽기가 주일 설교와 교회의 성경공부의 핵심적인 방향이 되어야 한다. 선교적 성경읽기에 대한 개인들의 노력과 이를 돕기 위한 실제적인 도구들이 제시되어야 한다. 

 

둘째, 선교적 교회로 전환되기 위한 위한 로드맵이 제시되어야 한다. 이 로드맵은 교회 안에 있는 선교 프로그램 한 두 개를 바꾸거나 추가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전체가 근본적으로 선교적 교회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교회 내부의 각 영역에 전면적인 변화가 요청된다.  이 과정은 많은 시간과 긴 여정이 필요하다. 선교적 교회로 전환되기 위한 로드맵을 제시하고 선교적 교회를 향한 긴 여정으로 차근차근 진행하는 과정에서 교회가 조금씩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선교적교회를 향한 로드맵과 교회들이 그 과정을 이해하고 천천히 동시에 근본적인 변화를 시도할 수 있도록 세부적인 도움과 안내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

 

1.  선교적 성경읽기의 실천

아래에 열거된 구절은 선교적 성경읽기를 실천한 몇몇 예들이다. 성경 전체를 선교적 관점으로 이해하고 그 의미를 찾는 수고와 노력을 해야한다. 구약의 모세오경, 율법서, 시편, 역사서, 선지서  뿐만 아니라 신약의 복음서, 서신서, 계시록 모두가 하나의 큰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 이야기는 바로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을 복 주시고 구원하시고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거대한 이야기의 관점에서 성경 읽기를 해야 한다. 

 

1) 창12;1-3

창12:1-3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첫 장면이다. 스스로를 보내시는 하나님은  또한 그의 백성을 세상으로 보내신다(1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그의 첫 백성으로 부르시고 그에게 새로운 땅을 향하여 떠난 것을 요청하시면서 그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신다. 그것은 복이 되는 일이다(2절). 많은 경우 본문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본문의 핵심은 아브라함이 복을 받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들어내는 것이다(3절). 

 

여기서 아브라함은 그를 통해 하나님의 복이 모든 족속에게 전달되는 복의 통로가 되는 정체성을 부여받게 된다.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는 최종적인 목적을 위해 아브라함이 먼저 복을 받게되고, 그 복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통해서 모든 종족에게 전달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최종적인 관심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땅의 모든 족속이다. 아브라함은 복이 되기 위해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이며 역할이다. 구약 성경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다. 땅의 모든 족속들, 즉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사람을 복주시는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복의 종착역이 아니라 복의 통로이다. 

 

2) 왕상8:22-43

역사서는 이스라엘 이란 나라의 역사기록이다. 이스라엘 역사의 정점은 하나님의 그들 가운데 영원히 거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성전건축의 의미다. 구약에서 성전은 건물이 아니다. 하나님의 임재다.  솔로몬 시대에 하나님의 성전이 완성된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 가운데 임했다는 증거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성전을 일구어가는 역사이다.  성전이 세워졌다는 것은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 가운데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전건축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 가운데 임하게 되자, 솔로몬의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께 기도한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임재하시게 된 것은 그의 조상때부터 약속하신 것을 이루려함인데 그것은 멀게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 그리고 가깝게는 다윗에게 약속하신 것이다. 그 약속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 결과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되는 일이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약속이다. 그 약속의 성취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임재하는 복을 통해서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솔로몬은 잘 알고 있었다(22-25절).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솔로몬의 두 가지 기도를 한다. 

 

첫째, 이스라엘 민족인 자신들에게 복을 달라는 기도다(27~40절).  둘째는, 그들에게 복을 주신 하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먼 지방에서 이방인들이 찾아올 것이며, 그 이방인들도 성전에 와서 하나님께 회개하면 복을 받게 해 달라는 기도다. 성전 즉 하나님이 그들에게 임재하게 된 이유는 땅의 만민(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그들도 이스라엘백성들처럼 하나님의 경외하는 일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솔로몬의 정확히 알고 있었다(41-43절). 하나님의 백성의 기도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 복을 받는 것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장소 가운데로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다 나아와 복을 복을 받게 되는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재하시는 이유이다. 

 

왕상 10장을 보게 되면 솔로몬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먼 지방에 있던 이방인인 스바의 여왕을 솔로몬의 성전으로 오게 한다.  하나님이란 분이 솔로몬왕을 엄청 복주셨다는 하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스바의 여왕이 찾아 온 것이다. 그리고 스바여왕은 솔로몬에게 있는 놀라운 축복과 하나님의 임재를 보고 나서 자신이 여호와를 찬양하게 된다. 즉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그들에 임재하는 축복을 주시자, 그 소문을 듣고 멀리 남쪽의 끝(마12;42)에서 솔로몬을 찾아 온 것이다. 그리고 솔로몬의 가진 모든 지혜와 지식와 엄청난 영광을 본 후 스바의 여왕이 여호와 하나님을 송축한다(왕상10:9). 

 

구약에서 성전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것은 단지 이스라엘백성의 구원을 위해서만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재한 하나님에 관한 소문을 들은 이방인들이 찾아와서 구원을 얻게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성전 즉 하나님의 임재는 단지 이스라엘백성만의 복을 위한 것가 아니다. 만민 복을 받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곳이다. 성전은 처음부터 만민이 다 와서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56:7). 이것이 성전에 들어간 예수님께서 상을 엎으시고 이 성전을 허물고 다시 짓겠다고 하신 이유다. 만민이 모두 와서 예배드려야 할 성전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차지하고, 그들끼리 하나님께 예배 잘 드리겠다고 비둘기를 팔고 돈을 바꾸고 한 것을 예수님께서 거부하신 것이다(마21:12-13).

 

2) 사 43:1-7

선지서의 첫 책인 이사야서는 성경전체의 메시지를 한권 안에 잘 들어내고 있다. 그 가운데도 43:1-7절에서는 성경 전체에 나타난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네 가지 사역을 말씀하신다.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첫번째 사역은 창조다(1절).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온세상은 하나님의 소유된 피조물임을 선포하신다.  하나님의 두번째 사역은 사랑이다.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을 사랑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품과 핵심적인 사역이 바로 사랑이심을 선포한다.(2-4절), 하나님이 세상을 향해 들려주시는 세번째 핵심적인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이야기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 (7절)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에게 사랑을 받으시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말씀하신다. 성경은 인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이야기이다. 네째, 성경의 또 하나의 중심적인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데, 동서남북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이야기이다.(5-7절) 성경 가운데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 이 네 가지가 중심적인 이야기이다.  성경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다. 세상을 창조하시는 것과 사랑하시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은 온 세상으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창조와 사랑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온 세상에 보여 주시는 것이다. 

 

3) 단 3:8-18

다니엘서는 구약의 계시록에 해당된다.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에게 환상 가운데 보여주시고, 이를 성취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단3장에 들어서면 느브갓네살왕은 자신의 권력을 상징하는 금신상을 만들고 모든 사람들에게 절하라고 한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이를 거부하고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 던져지게 되었다. 그들은 왕의 신을 섬기는 것을 거부하고 풀무불에 들어가기를 자청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은 풀무불에서 건져내 주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건져주지 않으셔도 자신들을 왕의 신을 섬기지 않고 풀무불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한다(17-18절). 어떻게 이런 선언을 그들이 할 수 있었는가는 궁금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건져주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잠시 고통 가운데 들어가는 것은 그나마 이해가 되지만, 건져주지 않으셔도 풀무불에 들어간다는 것은 무슨 믿음 때문인가. 혹시 하나님이 건저주실 능력이 없어서 왕이 만든 신에게 절하지 않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것을 이해하려면 2장으로 거슬러가야 한다. 꿈을 꾼 느부갓네살은 그 꿈이 분명히 자신의 권력과 관련된 어떤 것임을 직감하였지만, 자신의 꾼 꿈의 내용과 의미를 몰라 번민하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자  그 왕에게 다니엘이 꿈을 해석하겠다고 자청하고, 자신의 세 친구들과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밀한 것을 환상으로 보이시자 그들이 하나님을 찬송한다(19절). 그 은밀한 것은 다니엘의 조상들때 부터 그들에게 보여준 어떤 것이었다(23절).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로 이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꿈의 해석을 통해 선언한다. 그것은 바로 모든 권력이 무너지고 마지막 날에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것이라는 것이다(44절).  

 

반면 느브갓네살 왕은 다니엘이 하는 꿈의 해석에 첫 부분에서 자신의 권력이 금머리가 될 것이라는 자신이 기대하고 있었던 이야기를 듣고 나자 그 이후부터는 다니엘의 꿈의 해석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4장에 가서 자신의 권력을 상징하는 금신상을 만들고 거기에 모든 사람들을 절하라고 한 것이다. 그 과정에 왕은 각 백성과 나라와 각 언어(방언)으로 말하는 모든 사람들을 다 모우고, 금신상에 절하도록 강요한다(3;4). 다니엘의 세 친구가 거부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모든 나라와 백성과 방언으로 부터 예배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 외에 어떤 존재도 모든 나라와 백성과 언어로부터 예배 받으실 수 없다는 확신이 그들로 하여금 풀무불 속에 들어가게 한 것이다. 4장 3절이후 다니엘서에 “모든 나라와 백성과 언어(방언)”이란 말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3:7,29, 4:1, 6:25) 동일한 순서의 문장이 다시 등장하는 장면은 요한계시록이다(계5;9, 7:9).  

 

신구약의 계시록 모두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은 모든 나라와 백성과 방언(언어) 들에서 많은 사람이 하나님만을 예배하게 될 것을 동일하게 예언하고 있다.  이 예언의 성취는 바로 창12;3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다. 마지막 날에 모든 족속들이 복을 받고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라는 그 약속의 성취다. 성경은 바로 모든 나라와 백성과 방언(언어)들에서 모두가 나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예배하게 되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4) 마 1;1

신약성경의 첫 문장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고 시작한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소개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구약 성경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요약하면서 그 약속이 예수의 삶을 통해서 성취될 것을 선언하는 말씀이다. 신약시대이 시각에서 보는 아브라함은 누구인가. 아브라함은 단지 유대인의 육신적 조상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준 첫번째 사람이고, 그의 후손들을 통해서 성취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 약속을 한 후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신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했다는 하나님의 선언이다 (창17;5).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이 아니라 장차 하나님의 복을 얻게 될 모든 사람 중 첫 번째로 복을 받은 자로  모든 민족들의 조상인 것이다. 

 

신약시대에 유대인들에게 다윗은 누구인가. 다윗은 이스라엘 왕으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와 민족 전체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이스라엘백성)들을 통해서 모든 민족을 복 주시는 일을 이루어갈 민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예수님은 육신적으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대표하는 다윗의 후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통해서 이루고자했던 약속을 그들이 완수하지 못했는데, 이제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성취하게 될 것이라는 선언이다. 

 

결국 예수님의 정체성은 단지 아브라함과 다윗의 육신적 혈통에서 오셨음이 중요한 것이아니라 아브라함과 다윗(이스라엘)을 통해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목적인 온 세상을 복주시고 구원케하시는 일의 완성을 위해 오신 분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신약성경 전체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 때문에 결국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기 까지 한 것이다. 마8:10-12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기고 그의 부하를 고치신 다음 유대인들을 향해 마지막 날에 동서로 부터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이삭와 야곱과 함께 천국에 있을 것이고 그 나라 본 자손들(유대인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게 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인 선언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이며 천국에 들어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 전체에 나타난 예수님의 지속적인 관심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이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가 아브라함이 복을 받는 것 때문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해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는 것과 같이, 신약에서 예수님의 목적은 유대인들의 구원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통한 모든 민족의 구원이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혈통으로 태어나고 유대인들을 제자로 삼은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러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함이다. 

 

5) 눅 24:1-24

성경을 가장 잘 아는 분은 예수님이시다. 그분이 구약 율법을 아시는 분이시고 그 율법의 완성자로 오신분이시다. 신약성경은 결국 예수님의 삶의 기록이다. 따라서 신구약선경 전체가 무엇을 말하는가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성경의 핵심 주제로서의 선교는 예수님의 선언에서 잘 나타나 있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이 나(예수)를 가르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예수님의 부활과 죽음)이니”(눅24:44)라고 구약성경 전체가 예수님의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이 성취될 것을 기록한 것이고 성경의 기록대로 그 일이 일어났다고 선포하신다 . “ 또 이르시되 이같이(구약의 성경이 성취된 것 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박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46-48절). 

마치 구약(모세와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서 예언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설제로 성취된 것 처럼, 이제 예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된 신약성경의 사건이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임을 선언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신구약 전체는 바로 예수님의 사역과 그 사역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에 대한 예언의 기록이며,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것처럼, 예수님의 구원하시는 이름이 모든 족속에서 전파될 것이라는 신약의 예언도 성취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6) 롬4:1-16

아브라함과 유대인 그리고 오늘 예수를 따르는 자들와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한 사람을 서신서의 주 저자인 바울이다. 롬4장1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포함한 유대인들이 다 아브라함의 육신적 후손들이다라고 말하면서 논리를 전개해 간다. 유대인들의 시조로서 조상 아브라함이 왜 자신들에게 자랑스러운가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의롭게 하심을 받았고, 따라서 바울은 그의 후손들이 유대인들도 자동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게 된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아브라함의 선한 행위 때문이 이나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겠다는 말씀에 그가 믿음으로 반응한 결과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1-3절). 

 

신약의 바울이 성경이라고 말할 때 성경은 구약성경이다. 창15: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하늘의 별들을 보라고 한 다음 아브라함에게 너희 자손이 저 하늘의 별처럼 수없이 많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축복을 하셨다. 이 축복하심에 대해 아브라함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반응한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게 하셨다는 주장이다. 즉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아브라함의  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복주시겠다고 할 때 믿음으로 반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이 복을 받은 것은 그가 할례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무할례 상태에 있었을 지라도 하나님이 그를 축복하시겠다는 것에 믿음으로 반응했기 때문이므로, 유대인들이 자신들은 할례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복을 받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라는 것이다(9-10절). 결국 누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되는가하면 할례 여부와는 상관없고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고 할때 믿음으로 반응하는 모든자가 아브라함 처럼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조장이다. 

 

아브라함은 할례받은 유대이들의 육신적 조상기는 하지만 실제 아브라함으로 자신처럼 믿음으로 복을 받는 믿음의 자취를 따를 모든 자들의 조상이다(13절). 결국 아브라함은 구원받게 될 모든 사람의 조상이다(16절). 이것은 창12:3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족속들이 복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이 실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로마서를 썼던 바울은 로마서 전체를 통해서 구원얻는 길은 유대인들의 율법을 지키는 육신적 혈통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 복된 소식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 모두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게 되고, 그들 전부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을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바울은 15장에서 로마서를 마치면서 이것이 바로 자신이 이방인을 위한 예수의 일꾼이 되어 이방인들을 위한 제물로 자신을 드리는 이유이며 자신의 자랑이라고 말한다(16-17절). 또한 자신은 이미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복음이 전파된 곳 보다는 복음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자들에게로 가겠다는 (20-21절) 선언도 이런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로마서는 단지 교리서가 아니다. 오히려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복은 유대인 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 것을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고, 아브라함은 이것을 믿었고, 우리고 이것을 믿을 때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이 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7) 계 7:9-10

계시록의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기록이다. 하나님께서 사도요한에게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환상으로 보여주고 이를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에는 우리가 잘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분명한 것은 계시록에 기록된 일들은 마지막날, 즉 주님의 재림, 그리고 이 세상이 마감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될 때 일어날 일들을 기록한 것이다. 미래에 일어날 일이긴 하지만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미래에 성취될 것은 보여준 것이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시간적으로 미래의 일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이미 성취된 일이다.  

 

미래의 일들이기 때문에 인간이 경험하지 못한 장면들이 등장한다. 동시에 지금 우리들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바로 7:9-12 절이다. 마지막 날(이 일 후에)에 일어날 일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언어)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예수 그리스도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한다.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다고 선언한다. 이 선언은 하나님께서 4천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인 마지막에 모든 족속이 다 복을 얻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성취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취를 이루신 하나님의 우리의 찬양과 경배의 유일한 대상이 되는 것이다. 

 

2. 선교적교회 로드맵의 실천

지역교회가 선교적 교회로 변화되는 일은 상당히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몇몇  새로운 프로그램을 도입하거나 구조를 바꾼다고 되지 않는다. 교회 전체의 체질이 변화되어야 한다. 교회 구조와 구성원들의 각 영역에서 길고 세밀한 변화를 요청하게 된다. 지난 2013년부터 몇년에 걸쳐 KODIMNET(Korean Diaspora Mission Mobilization Network) 한 지역교회가 선교적 교회로 나아가기 위한 선교동원과 교육의 로드맵을 작성해 이를 발전시켜가고 있다. 

 

1) 로드맵의 구조

선교가 단편적인 독립된 프로그램이나 사역이 아니라 교회의 존재적 DNA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지 못하는 이유는 지역교회가 자신들의 득특한 상황과 조건 안에서 스스로 토착화된 선교 모델과 사역을 찾아갈 수 있는 기본틀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드맵의 목적은 선교교육과 동원을 위한 특정한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각 공동체 스스로 자신들에게 적합하고 자신학화된 프로그램과 선교활동을 찾아나갈 수 있는 틀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2) 로드맵의 여러 단계들

그림에서 보듯이 로드맵을 여러 단계로 나누었다. 시작단계(Beginning stage), 잇슈확인단계(Identifying issues), 핵심성공요소확인단계(Critical Success factors), 주요사역성취단계(Key Result Areas), 최종목표성취단계(End Goal) 등으로 구분하였다. 

 

시작단계: 교회가 선교와 관련된 다양한 문제나 사역들이 그들 속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는 의식이 생기는 단계이다. 이를 위해 선교와 관련되어 현재 교회에서 하고 있는 활동, 프로그램, 사역들을 확인하는 단계다. 여기에는 선교적으로 긍정적이고 역동적인 것도 있을 수 있고,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과정을 통해서 교회는 현재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선교에 무엇인가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게 되고, 새로운 변화를 위한 로드맵 작업에 참여하는 계기가 된다. 이 단계에서, 선교가 활발하게 일어나는 교회는 교회대로, 혹은 반대로 선교에 전혀 관심이 없는 교회는 그 나름대로의 현실 인식을 하게 된다.   

 

이슈확인단계(Identifying issues): 교회 안에 선교와 관련하여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파악하는 단계이다. 선교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가 혹은 그 반대인가의 여부와 관계없이 각자의 교회 안에 선교와 관련된 어떤 이슈들이 있는가를 파악하는 단계이다.

 

핵심성공요소단계(Critical Success factors):  성공적인 선교적 변화를 위해서는 교회내부의  어떤 요소들이 변화되어야 하는지를 확인하는 단계이다.  

 

주요사역성취단계(Key Result Areas): 교회 안의 선교를 위한 주요한 요소들이 성공적으로 변화된다는 전제하여 어떤 사역적열매를 교회가 성취하길 원하는지를 수립하는 단계이다. 

 

최종목표성취단계(End Goal): 교회가 선교와 관련해서 최종적으로 성취하기 원하는 목표를 발견하고, 결국 교회가 그 목표에 도달하게 되는 단계를 말한다.

 

3) 각 단계별 로드맵 작성 

한편 로드맵을 작성하는 과정은 위에서 언급한 순서와는 다르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시작단계(Beginning stage) - 최종목표성취단계(End Goal)  - 잇슈확인단계(Identifying issues) – 핵심성공요소단계 (Critical Success factors) - 주요사역성취단계(Key Result Areas)의 순서로 논의를 진행해 갈 필요가 있다. 

 

즉 교회가 선교와 관련되어 최종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길 원하는 가에 대한 최종목표(end goal)를 먼저 생각해 보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전략들을 만들어가는 것이 실제적인 로드맵 제작의 과정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순서에 따라 각 단계에서 일어나야 할 논의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4) 시작단계

시작단계는 우리 교회 내의 선교적 현실을 열거해 확인해 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  그리고 평가 없이 진행되는 반복적인 사역들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단기선교여행, 선교학교, 선교사 파송, 선교위원회 활동, 선교모금, 선교집회, 선교대회 참석, 선교사보고, 외국인근로자사역 등의 활동이 있을 수 있다. 이것들을 어떻게 효과적을 잘 해 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다. 또한 선교와 연관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의문이나 문제제기들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국내전도와 해외선교의 우선순위의 갈등, 이슬람의 확장에 대한 두려움, 선교사 파송과 후원에 관련된 문제, 제한된 재정을 선교에 투자할 것인가 교회건축에 투자할 것인가, 작은 교회가 선교에 참여하지 못하는 열등감 등의 다양한 문제들이 선교와 관련되어 교회 안에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문제들을 나열해 본다.

 

5) 최종목표성취단계

시작단계에서 그 다음으로 먼저 그려봐야 할 로드맵은 최종목표성취에 관한 내용이다. 과연 각 교회는 선교와 관련해서 어떤 최종목표를 가질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고 결정해야 한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최종목표에 대한 명확한 그림없이 선교에 참여함으로서 선교가 방향을 잃게 된다.  코딤넷(KODIMET)에서 논의된 교회선교의 최종적인 목표는 다음과 같다 “선교적교회로의 전환과 성도의 선교에 대한 본질 이해와 실천”이 일어나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적으로, 교회가 선교에 참여하는 것의 최종적인 목표는 단지 몇몇 선교프로그램을 실행하거나 수 명의 선교사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교회 존재 자체가 선교적이어야 하다는 것이고, 개인적으로는  성도 개인의 삶 속에서 선교적 삶이  실천되는 것이  그 목표이다. 다시 말하면  즉 교회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과  개인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6) 이슈확인단계(Identifying issues)

최종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작성해야 하는 그 다음  로드맵은 현재 각 교회 안에 선교와 관련되어 어떤 문제 혹은 이슈가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코딤넷모임에서는 각 대륙별로 그룹을 나눠 각 지역 교회들 안에 있는 선교 이슈들을 논의해 보았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8개의 이슈들이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각 이슈들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도 실례에서 보는 것 같은 세분적인 문제들이 있을 수 있다.  1)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통합적 이해 부족  2) 타문화에 대한 무관심  3)개교회 우선주의  4)  선교훈련부족  5) 재정 사용 우선순위의 이슈  6) 선교에 대한 부정적 시각 확산  7) 삶과 선교의 괴리  8) 디아스포라 상황에 대한 선교적 인식 부족  등의 이슈가 있었다.

 

7) 핵심성공요소단계(Critical Success factors)

핵심성공요소단계는 교회가 현재의 문제를 극복하고 선교적 최종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내부적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중요한 요소(인력, 구조 등)들이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변화가 일어나도록 유도하는 단계이다.  이 과정이 없이는 실제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게 된다. 논의 한 결과 아래의 5가지 영역이 변화되어야 할 핵심성공요소로 확인되었다. 각 요소 따른 세부적인 실천 내용도 정리했다. 

 

(1) 리더구룹의 통합적 선교 자각  일어나기

모든 조직 안에서 변화를 위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결국 리더십의 변화이다. 따라서 선교적 교회로 전환되기 위한 첫번째로 중요한 요소는 목회자를 포함한 교회 리더십들이 통합적인 선교의식을 소유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다. 

 

(2) 이원론적 선교관 극복하기

기독교의 고질적인 이원론이 선교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판단되었다. 선교는 선교사나 혹은 특별한 사람들만 참여하는 것이고, 선교는 지리적으로 멀리가야만 하기 때문에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이원론적 생각을 극복하고 성도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선교가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3) 교회들의 선교적 상황에 대한 인식 강화 

교회는 그들이 사는 곳이 선교적 상황이라는 인식을 가지는 것이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의 요소이다. 국내의 교회 뿐만 아니라 해외에 거주하는 한인교회들이 그들이 처해 있는 곳이 그들에게는 이미 타문화권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못하고 있다. 이것은 한인디아스포라교회들이 한인으로서의 구심력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외국에 와 있으면서도 현지 문화와는 아무 관련없이 사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일상 만나는 현지인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지 못하거나 보길 거부하는 경향도 있다. 그 결과 선교지에 와 있으면서도 선교를 위해 또 다른 나라를 찾아 나서는 기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한인교회가 자신들이 처한 현실이 타문화권 선교의  현장임을 깨닫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4) 자원 사용 우선순위 

교회의 제한된 자원 사용의 우선순위를 새롭게 하는 것이 선교활성화의 성공요소 중에 하나이다. 선교가 우선순위에서 가변적 위치에  있으므로 교회 재정 상황에 따라 선교의 지속적인 지원 여부가 유동적인 경우가 많다. 재정을 줄여야 할 때 선교재정을 최우선적으로 줄이는 경우도 있다. 이런 유동성은 자원 사용에 대한 우선순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5) 교육훈련 시스템 

선교가 한번의 이벤트가 아니라 지속적인 교회 사역이 되기 위해서는 선교교육시스템 구축이 중요한 성공요소가 중 하나이다. 대부분의 교회 안에 지속적인 선교교육 프로그램이 없거나 있더라도 준비된 커리큐럼을 가지고있기 보다는 즉흥적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타문화를 이해하고 거기에 적합한 전도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습득하는 일은 단번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교의 아마추어리즘을 극복하는 방안 중에 하나는 교회 안에서 체계적이고 좋은 선교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6) 파트너십과 연대 

선교가 이뤄지는 기본적인 틀은 파트너십과 협력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선교가 연합을 통해 이뤄지는  DNA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파트너십은 교회 안의 부서들 간의 연대 뿐만 아니라, 교회와 선교단체, 교회와 교단, 교회와 지역의 다른교회, 교회와 현지교회의 연대 다양한 차원에서 일어날 수 있다.  

 

8) 주요사역성취단계(Key Result Areas)

이 단계는 구체적으로 어떤 사역적 성취를 각 교회가 이루길 원하는 가를 확인하는 단계이다. 이 사역적 성취의 내용은 각 교회마다 공동체 마다 다를 것이다. 여기서 제안되는 것은 단지 하난의 제안일 뿐이다. 각 교회가 원하는 이루길 원하는 사역은 각 교회가 결정하게 된다.  다아스포라교회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성취하길 기대하는 주요 사역은  1) 전 교회적 선교 실행 2) 개인적 실행  3) 선교사로 헌신과 선교단체와의 연결  등으로 나타날 수 있다.

 

9)정보 및 자료 제공

로드맵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필요한 정보들이 제공되어야 한다. 실제 교회의 선교 활성화를 위한 정보와 자료는 너무나 많이 있다. 문제는 각 교회가 자신들에게 적합한 훈련프로그램, 자료 그리고 정보를 제공받는 통로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각 지역교회는 조금만 노력하면 다양한 통로를 통해서 필요한 정보와 자료를 제공받을 수 있다. 

 

가장 빠른 방법은 선교단체와 접촉하는 방안이다. 선교동원단체를 접촉하면 더 광범위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필요한 정보를 획득하는 방법은 넓은 정보를 통해서 점차적으로 집중적인 정보를 얻어가는 방법이 좋다. 개괄적인 선교 정보와  해외선교단체와 관련된 일차적인 정보는 인터넷을 통해서도 충분히 확인 할 수 있다. 단번에 필요한 정보를 손쉽게 얻는 방법은 없다.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선교단체와 만나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한다. 여기에 열거한 정보는 단지 몇 가지 예로 나열한 것 뿐이다. 1) 선교교육 관련정보  2) 도서 및 정기 간행물  3) 동영상 4) 선교기도  등의 정보와 자료를 제공할 수 있다.

 

10) 아웃소싱(outsourcing), 인소싱(insourcing)

선교관련 모든 활동과 자원을 다 교회 내부에서 충당할 수 없다. 어떤 자원은 교회 내부에서 발굴하거나 발전시킬 필요가 있고, 어떤 자원은 이미 외부에 존재하는 자원을 사용하거나 위탁할 수 있다.

 

(1) 인소싱(insourcing) - 성도들은 선교적 은사 은사, 타문화경험, 전문성, 선교관심도 등의 심층 조사를 통한 선교관련 자원정보 조사하기. 교회주변 지역 연구 등을 할 수 있다. 

   

(2) 아웃소싱(outsourcing) - 선교단체와의 각종 협력. 다른교회/주류교회/타민족교회와의 협력. 현지선교사와 협력. 디아스포라인구변동조사자료. 포럼에 참여. 선교대회 참여(선교한국대회, Mission-net, LMC, Urbana, GKYM) 등을 할 수 있다.

위에서 제시한 로드맵은 일종의 시도이다. 이것을 기준으로 각 교회는 자신들에게 적합한(자신학화된) 선교동원과 훈련을 위한 나름대로의 로드맵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로드맵의 전체틀은 그대로 유지하되 각 항목에 내용은 교회별로 리더십들이 모여서 함께 논의해서 만들어 갈 수 있다. 이런 선교로드맵을 결국 성도들이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소개되어야 한다. 또한 이 로드맵은 일회적으로 일직선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인식, 이해, 헌신, 반추 및 평가(A,U,C, R, E: Awareness, Understanding, Commitment, Reflection, Evaluation) 지속적인 반복으로 나선형의 궤적으로 그리면서 점차 향상된 모습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 

     103. 설악포럼 2015-5: 초대교회의 풀뿌리 선교 운동에서 배우는 교훈 (손창남, OMF)
     101. 설악포럼 2015-3: 한국선교 및 선교사 평가 (정민영, 위클리프국제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