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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육화(脫肉化)와 선교_김동화(GMF 대표) 프린트   
전병준  Email [2017-05-26 16:18:24]  HIT : 301  

탈육화(脫肉化)와 선교


김동화_GMF 대표


무서운 속도로 발전해 가는 오늘날의 IT기술은 대단히 중요한 선교적 함의를 갖고 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공동체’와 ‘함께함(engagement)’에 관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별개의 문제라기보다는 한 가지 문제의 두 가지 양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선교와 교회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에 관한 것이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지체들의 유기적인 연합으로서의 ‘몸’으로 표현되었다(롬12:5, 고전12:12-27, 엡5:30, 골1:24, 3:15.​). 교회는 약육강식의 잔혹한 로마 사회에서 대안적 공동체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 공동체성에 매료되어 회심하였다(행2:42-47, 4:32-35, 5:12-14). 그리고 삶을 함께함의 표현인 함께 먹는 것은 이 공동체를 하나 되게 하는 중요한 방식이었다(마11:19, 행2:42-37​). 토론이나 대화보다도 인간이 가장기본적이고 육체적인 욕구인 먹는 것을 통해 교감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먹는 것은 인간의 연약함과 상호의존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함께 먹는 것은 실제로 우리 인간이 몸과 몸으로 서로 만나는 일이며 연약하고 서로를 필요로 하는 자로 삶을 함께 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공동체성과 함께함이 크게 위협받는 상황이 가속화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세속 학자들도 큰 우려를 표하고 있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최근에 어떤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공동체의 붕괴와 인간이 몸을 통해 교감하고 살아가던 것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런데 지난 100년간 지역 커뮤니티가 붕괴했다. 마을, 가족이 함께 무너지는 중이다. 소외와 외로움은 여기서 발생한다. 인간은 지난 100년간 자신의 감각을 잃었다. 숲에서 버섯 따 먹던 시절이 그렇게 오래된 게 아니다. 당시의 인간은 호랑이가 나를 습격하지 않을까 예민했고, 버섯에 독은 없을까 민감했다. 시각·청각·후각·촉각·미각…. 지금 남편은 아내가 보낸 이메일을 스마트폰으로 확인하며 대형 마트에서 쇼핑한다. 우리는 몸에 대한 통제력과 감각을 잃었다”

 

오늘날의 세계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자동화와 상시 연결의 길을 가고 있다. 공장은 자동화되고 상거래도 대부분 온라인 상에서 이루어진다. 사물 인터넷 시대가 시작되었고 사람 대신 로봇이 사람을 돌보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시장에서 흥정을 하는 일도 없어져 가고 더 나아가 물건을 사기위해 집 밖을 나갈 필요도 없어져 가고 있다. 은행에서는 고객이 찾아오는 것을 싫어한다. 그리고 허리가 쑤시면 비가 올 것 같다고 말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다. 간단하게 스마트폰으로 은행 거래가 이루어지고 날씨도 알 수 있다. 

 

리차드 세네트는 이러한 현대인의 삶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공항 라운지라고 하였다. 공항 라운지는 어느 나라에서나 비슷하다. 공항 라운지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관계(engage)하지 않는 비인격적인 공간으로 설계되어 있다. 어느 누구도 공항 라운지에 소속감을 느끼지 않는다. 거기서는 큰 소리로 얘기하지 않는다. 일행이 아닌 사람들과 대화하는 일은 거의 없다. 마치 투명인간처럼 서로를 대한다. 무슨 일을 할 것인지는 모니터를 보면 된다. 기다리는 시간 동안에는 모두들 스마트폰이나 타블렛을 통해 그 곳을 벗어난다. 몸은 그곳에 있지만 마음과 생각은 그곳에 있지 않으며 인터넷을 통해 먼 곳에 가 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모니터 상에서 만나고 대화한다. 육신으로 만나고 부딪히고 어울리는 일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탈육화(脫肉化, excarnate) 현상이라고 부른다. 오늘날의 세계는 인간의 경험을 탈육화하고 사람들을 마치 물건이나 아아디어 정도로 대한다. SNS나 블로그 상에서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것과 텔레비전에 방영되는 비정하고 냉혹한 이념적 토론이 그러한 양상을 잘 보여주는 것들이다. 도덕과 윤리에 있어서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 포르노와 인터넷 도박, 좀비와 뱀파이어 영화 등에서 그러한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인터넷을 통한 가상의 공간에서 어디에든 순식간에 들어갈 수 있지만 그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은 영적, 정서적인 단절을 경험한다. 

 

이러한 변화는 이제 정보통신 기술이 앞서 있었던 선진국에서 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에서도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과 같은 나라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이 사역하는 곳에서도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에 인도에서는 스마트폰으로 은행거래를 하는 것이 확산되고 있는데 이는 한꺼번에 몇 단계를 뛰어넘는 변화인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선교지에서도 전통적인 공동체가 와해되고 탈육화 현상이 급속히 확산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여행객처럼 점점 더 일정한 장소와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삶을 살아간다. 이동성과 한시성이 그러한 삶의 특징이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한 세계관에 헌신하거나 충성하려 하지 않는다. 몸은 공항 라운지에 있지만 마음은 소셜 미디어를 검색하거나 온라인 게임을 하거나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CNN 뉴스를 보면서 다른 곳에 가 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서 유리(disembodied)되어 자유롭게 배회하고 떠돌아다니는 존재로 살아간다. 이동성과 한시성은 영적인 노숙 상태를 자져온다.​

 

많은 경우 인터넷 속의 세상으로의 몰입은 고통스런 삶의 현실을 잊게 하는 스크린 중독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터넷 과잉은 노력으로 해결되기가 어렵다. 결핍은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과잉은 본능과 싸워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공동체 해체와 탈육화 현상은 선교를 하려는 사람과 선교지의 사람들 모두에게 일어나고 있다.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한 몸을 위해 부르셨다’라는 것과 같이 몸에 대한 말씀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되어가고 있다. 몸으로 드리는 성례와 예배 그리고 다양한 실천의 형태에서 괴리되어 우리의 신앙이 점점 더 머리에만 머무는 경향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계몽주의에서 시작된 합리주의와 기능주의가 가져온 현상이다. 계몽주의 이후에 사람들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이외에 모든 것을 의심하고, 인간이 미신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사고를 극대화 하면 인간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머지않아 종교는 사라질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현상은 20세기의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과 스탈린, 모택동,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등으로 주춤하는 것 같았다. 세상이 발전하려면 어떤 종류의 사람들은 말살시켜야 한다는 생각도 그러한 합리주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끔찍한 일을 태연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합리적 사고와 능률 추구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모더니티라고 하는 이러한 세속적 근본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영성을 추구하고 진리의 상대성을 강조한 포스트모던이라는 새로운 사조가 시작되기는 하였지만 모더니티는 계속 맹위를 떨치고 있다.

 

합리주의와 기능주의의 산물인 1차 산업혁명 이후 산업 사회가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처음으로 잉여재산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자율적 개인이 등장하면서 각자가 자기 인생을 책임져야하는 개인주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기술의 발달은 전문화와 분방화를 통해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인간의 삶은 인격적 관계가 사라지고 파편화되어 갔다. 이는 곧 공동체의 붕괴를 의미하기도 한다. 결국 파죽지세의 모더니티 세계관은 세계화

를 통해 무한경쟁을 불러왔다. 어떤 상품이든 전 세계에서 가장 싸게 그리고 가장 빨리 만들어야 경쟁에서 살아남는다. 세계화가 가져온 무한경쟁은 개인주의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이처럼 관계 보다는 효율과 능률을 중요시하는 합리주의적, 기능주의적 가치관은 상호 돌보는 공동체의 붕괴와 함께함이 없는 삶을 가속화하는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을 통해 더욱 확산되어가고 있다. 혼밥족이 등장하고 우울증이 만연하며 고독사가 빈번히 일어나는 상황이 그 결과이다.

 

이러한 상황은 세상을 기능적, 기계적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어서 우리가 성경을 읽는 방식에도 영향을 끼치고 결국 교회의 사명/선교(mission)도 탈육적인 접근을 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구질구질한 현실 속으로 들어가기 보다는 멀찍이 거리를 두는 방법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단기 선교 여행이 그렇고 전도에 있어서 다시는 만날 일이 없는 낯선 사람들을 향한 사역 형태(치고 빠지기)를 선호하는 것에서 이러한 경향이 잘 나타나고 있다. 인터넷 웹페이지에서 한 두 번의 클릭을 하는 것으로 선교에 참여했다고 생각하는 것(click activism)과 휴가 기간에 잠간 단기 사역에 참여하는 것(vacationaries라는 신조어가 있다), 여행 중에 잠간 자원봉사를 하는 것(voluntourists라는 신조어가 있다)으로 선교를 대체하려는 경향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비참여(함께함이 없는 것, disengagement)와 탈육화의 시대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보다 철저한 육화된(embodied) 신앙으로 복음을 성육신적 삶의 방식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엄청난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 부터의 구별됨(called out)과 세상 속으로 들어가 함께함(sent into)의 부르심을 동시에 받고 있다. 구별됨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규명해 준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그런데 이 구별됨은 함께함을 위한 것이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 우리가 구별된 자로 세상에서 죄로 인해 고통 받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복음을 성육신적으로 증거 하는 길이다. 두 아들의 비유(눅15)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돌아온 탕자인 둘째 아들과도 그리고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첫째 아들과도 기꺼이 함께하는(engage)하는 것이 선교적 삶을 살아야 할 우리들의 모습니다. 이러한 선교적 삶은 이 아버지처럼 아들에게 뛰어가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던 문화에서 자신에게 쏟아질 비웃음을 감내하고 둘째 아들에게로 나아가며,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으로 부터 거절당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치욕으로 간주되던 문화 속에서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절한 첫째 아들에게도 그 치욕을 개의치 않고 나아가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선교적 삶의 모습은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을 향해 옷을 찢음으로 자신도 살과 피를 가진 인간임을 보여 주면서 우리도 너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동일시(행14:14-15)하며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떠는(고전2:3)” 성육신적 자세(취약함을 들어냄, vulnerability를 갖는 것)를 잃지 않으려 하였다. 이것이 21세기도 필요한 복음 증거의 자세이다.

     417. [철.호.생.각 #25] 세계교회의 미래
     415. [철.호.생.각 #24] 경계를 넘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간을 이해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