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 중 제가 속해있는 BBB(직장인성경공부모임)에서 전도훈련을 받을 때의 일입니다. 이 기회에 라산타와 사무드라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웹사이트에서 싱할리어로 된 사영리를 찾아 출력하고는 퇴근 후 교회로 향했습니다. 사영리가 완벽한 전도수단은 아닐지 몰라도 영어가 썩 잘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복음의 메시지를 간결하게 전하는 데는 좋을 것 같았습니다. 마침 수요일이어서 예배를 드린 후 교회 로비에 가서 누구든 먼저 오는 사람을 기다렸습니다.

  처음 구나완을 만났던 것도 교회 공중전화 앞이었지만 그 이후에도 따로 약속을 하거나 숙소에 찾아가지 않을 때에는 교회 로비 공중전화 앞이 친구들을 만나기 가장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항상 친구들이 전화를 하러 왔었거든요. 선교적 상황에서 접촉점이라는 것이 있다면, 제 경우엔 공중전화가 바로 하나님께서 저에게 허락하신 접촉점이었습니다. 나중에 지점 근무를 하다가 오랜만에 서울에 올라와 교회를 방문한 어느 날 공중전화가 있던 자리에 전화가 있던 구멍만 뻥 뚫려 있고 전화기가 사라진 것을 보았을 때는 제 마음도 왠지 뻥 뚫린 것 같았습니다. 휴대전화가 보급되면서 더 이상 공중전화를 쓰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공중전화가 사라져 가는 것이 당연했지만 왠지 아쉬운 마음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어쨌건 약속시간도 정하지 않고 어두운 교회 로비에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사무드라가 전화를 하러 교회를 찾았습니다. 살짝 일어나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사무드라의 마음을 준비해 주시고 순적히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무드라의 통화가 생각했던 것보다 길어졌고 제 기도도 뜻하지 않게 깊어졌습니다. 처음엔 조용히 묵도로 기도하던 것이 점점 간절한 기도로 바뀌고 그래도 통화가 끝나지 않자 나지막한 목소리로 찬양을 하고 더 깊게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사무드라가 통화를 하고 있는데 한 열 발자국 정도 옆에서는 제가 혼자 부흥회를 하고 있으니 저도 그런 상황이 너무 우스워서 기도를 하면서도 피식피식하고 웃음이 나왔습니다. 드디어 통화가 끝나자 저는 사무드라에게 가서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는데 차를 한 잔 하지 않겠냐며 교회 상담실로 데리고 가서 차를 타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 얘기해 주고 싶은데 내가 싱할리어를 몰라 직접 얘기해 줄 수 없으니 내가 준비해 간 이 자료를 나한테 읽어줄 수 있느냐고 부탁했고 사무드라는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책에 있는 내용은 원래 내가 사무드라에게 하고 싶은 말인데 내가 글을 읽지 못해 읽는 것을 부탁하는 것이니 그냥 읽지 말고 거기에 담긴 내용을 생각해 가면서 읽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사무드라는 제 부탁대로 약 10여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싱할리어로 된 사영리 책자를 소리내어 읽었습니다. 물론 저는 싱할리어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사영리 내용은 숙지하고 있었고, 또 사무드라가 워낙 분명한 발음으로 성심껏 읽어서 그 시간이 전혀 어색하거나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싱할리어로 사영리가 낭독되는 것을 들으면서 또 그 가운데 있는 성경구절을 읽는 소리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들으면서 싱할리어가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사무드라가 읽기를 마친 후에 전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믿지 않겠느냐고 초청을 했고, 사무드라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사무드라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 완전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었고, 앤튼을 통해 신앙에 대해 듣기도 하고 권유도 받은 적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자기나라 말로 복음에 대해 정확한 설명을 듣거나 본적이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사영리 책자에는 기도문도 있기에 저와 사무드라는 함께 기도를 했고, 사무드라는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2~3일 정도가 지난 후 다시 어둑한 교회 로비에서 라산타를 기다렸습니다. 사무드라처럼 라산타도 전화를 하려고 왔고 다행히 사무드라와는 달리 통화를 길게 하지 않아 오래 기다리지 않고 말을 걸 수 있었습니다. 사무드라 때와 같은 방법으로 할 말이 있다며 상담실로 안내하고 사영리 책자를 꺼내는데 라산타가 활짝 웃으며 너무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약간 어리둥절했지만 마찬가지로 라산타가 책자 읽기를 다 마친 후 예수님을 구주로 맞아들이지 않겠느냐고 묻자 너무 기쁜 표정으로 그러겠다고 하고 함께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라산타가 집으로 돌아가고 저도 돌아가는 길에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라산타는 이미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할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단짝인 사무드라가 얘기를 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라산타도 언젠가 제가 자기에게도 똑같이 예수님을 소개해 줄 것을 알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다음날 아침 교회에 들렀다가 출근을 하는 길에 화창한 가을날이어서 그랬던 건지 모르겠지만 제 마음이 세상 어떤 청량제로도 그렇게 할 수 없을 만큼 시원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평소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얘기는 거의 안 하는 저였지만 정말 그 날 만큼은 라산타와 사무드라를 생각하면 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왠지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고 자녀에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라산타와 사무드라와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만나 성경 공부와 한국어를 공부하기로 하였습니다. 원래부터 이 친구들과 교제하던 청년부 자매들과 제 아내도 함께 하였습니다. 돕는 지체들이 있어서 훨씬 힘이 덜 들고 그 과정들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가만 보면 남자들끼리의 우정과 우애도 돈독하지만 자매들 간에는 특별한 유대감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평상시 교제하고 연락하는 것은 대부분 자매들이 담당하였는데 제가 할 때 보다 훨씬 더 잘해서 진작 이렇게 할 걸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은 두 자매가 자국어로 된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스리랑카에 계신 선교사님께 부탁을 드려서 싱할리어 성경을 10권 정도 구입하였습니다. 성경공부는 영어로 진행하였습니다. 영어가 통한다고는 하지만 깊은 개념을 나누기에는 좀 어려움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 분과 어떻게 교제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충분히 나눌 수 있었습니다. 두 자매는 숙소에서도 둘이 따로 성경을 보고 기도하는 등 신앙이 자라갔습니다. 성경공부 자료는 영어로 되어 있지만 본문이나 참고 구절은 자국어로 읽을 수 있도록 인터넷에서 싱할리어 성경을 찾아 그 부분을 오려 붙였습니다. 찬양도 영어나 쉬운 우리말 찬송을 하기도 했지만 역시 인터넷에서 우리도 멜로디를 아는 싱할리어 찬양 가사와 MP3 파일을 구해 함께 부르기도 했습니다. 같은 멜로디에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찬양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필요한 자료를 찾는 게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열심히 검색을 하면 대부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자료를 구하는 것이 그 때보다도 훨씬 더 쉬울 것입니다.

  매주 성경공부 이후에 한국어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교재를 사용하기도 하였지만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생생한 표현을 익히기 위해 한국드라마를 활용하였습니다. 영어 공부를 위해 미국드라마를 대본과 함께 보며 표현을 익히고, 듣기를 연습하는 프로그램이 외국어학원에 많이 있었는데 이것에서 힌트를 얻은 것입니다. ‘불량아빠’ 라고 배우 손창민씨와 딸로 나오는 아역배우의 대사가 재미있는 드라마 파일을 구해서 노트북에 틀어놓고 또 따로 구한 대본을 보며 한국말 표현 등을 공부하였습니다.

  몇개월 정도 함께 공부를 한 뒤에 두 자매는 앤튼이 다니는 구로공단 근처의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교회는 공단 근처에 있어서 외국인근로자들에 대한 전문적인 사역프로그램이 있었고 또 스리랑카 사람들도 꽤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 같이 하며 잘 양육받을 수 있으면 좋지만 외국어 예배나 프로그램이 없는 상황이어서 아쉬운 마음이 있었지만 신앙생활 잘하길 기도하며 보내주었습니다. 나중에 두 친구들이 본국으로 귀국할 때 저희 집에서 그 동안 함께 했던 청년부 자매들과 함께 송별회를 하였는데 다들 섭섭한 마음에 부둥켜 안고 울었습니다. 남자친구들을 떠나 보낼 때에는 이런 광경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역시 자매애(sisterhood)가 특별하긴 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