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친구들과의 의사소통은 영어와 약간의 우리말로 하였습니다. 당시 합법적인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근로자들은 어느 정도 교육 수준이 있는 사람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국에 아무나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계기가 있었는데, 구나완이 한국에 오기 전 훈련받을 때 모습이라며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었습니다. 무슨 훈련일까? 하고 보니 머리도 짧게 깎고 얼룩무늬 바지에 카키색 런닝을 입은 것이 영락없는 우리나라 훈련병 모습이었습니다. 듣고 보니 당시 장군 출신인 수하르토 대통령이 통치하던 인도네시아에서는 한국으로 일하러 갈 산업연수 후보생들에게 4주간 군사훈련을 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먼 나라에 가서 나라망신 시키지 않고 일을 잘하려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심하지는 않았지만 훈련 중에 구타와 얼차려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산업연수생으로 그렇게 엄선해서 훈련시켜 보냈으니 교육을 어느 정도는 받은 사람들이 많았고,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도 꽤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학교에서 강사로 일하다가 돈을 벌러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창하지는 않지만 영어도 어느 정도하고, 또 한국에 있으면서 우리 말도 좀 배워서 의사소통에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보문고를 둘러보다가 제2외국어 코너에서 인도네시아어 책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인도네시아 친구들을 만나고 선교하는 마음으로 찾아가면서도 언어를 공부해 볼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연히 책을 발견하고 보니 인도네시아 말을 익히면 친구들과도 더 잘 소통할 수 있겠다 싶어 한 번 배워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책을 집어 들고 계산을 하고 나왔습니다. 그 때만 해도 그냥 단어나 표현 몇 개 정도 익혀야지 하는 정도의 생각이었는데 지금까지 계속 인도네시아와 인연을 맺으며 살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다행인 것은 인도네시아어가 영어와 같은 로마자 알파벳을 빌려서 문자로 사용하고, 문법이 복잡하지 않아서 처음 공부를 시작하기에 크게 어렵지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교재나 선생님을 구하기 어려웠던 저로서는 아랍어처럼 꼬불꼬불한 문자를 사용하거나 문법이나 발음이 아주 어려운 언어였다면 혼자 공부하는 것을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간혹 인도네시아어가 굉장히 쉽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거기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시작할 때는 다른 언어보다 조금 쉽게 시작할 수 있을지 몰라도 다른 나라 언어 중에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외국어를 잘하려면 그 문화와 생각에 깊이 젖어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감사한 것은 제가 우연히 찾아낸 인도네시아어 책이 초심자가 공부하기에 정말 좋은 책이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교재가 없던 저는 그 책이 닳도록 읽고 또 읽었습니다. 나중에 학교에 인도네시아어 강좌가 생겨서 반가운 마음에 등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첫 시간에 선생님이 칠판에 이름을 쓰셨는데, 제가 공부하던 그 책의 저자라서 얼마나 놀라고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선생님은 나중에 제가 말레이시아로 유학할 때 추천서를 써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때만 해도 인도네시아어를 따로 배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저는 공익 근무요원이었는데, 근무지에서 앉아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때 다른 책들도 읽었지만, 한 권 밖에 없던 인도네시아어 교재를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 숙소를 찾아갔을 때 배운 걸 써 보곤 했는데 그렇게 대화를 나누면서 발음이나 표현들을 교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인도네시아어로 된 읽을거리나 시청각 교재가 없다는 것이 항상 아쉬웠습니다. 외국어대를 다니던 친구에게 부탁해서 도서관에서 말레이어 테이프를 빌려 보기도 했는데 화질과 음성이 엉망이었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는 인터넷이 생겨서 인도네시아어로 된 신문이나 읽을거리는 찾아볼 수 있었지만 여전히 시청각 교재를 구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인도네시아는 워낙 크고 여러 문화와 언어를 사용하던 국가이다 보니 개국 초기부터 통신위성을 쏴서 언어와 문화를 보급하여 국가의 일체감 형성을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세계에서 4번째로 통신위성을 쏘아 올린 나라라고 합니다. 그 때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방송을 수신할 수 있는 위성 접시를 달고 있는 집들이 꽤 있어서 혹시 인도네시아 방송을 위성으로 받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알아본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적도 위에 있는 위성에서 신호를 받으려다 보니 너무 멀어서 접시 반경이 너무 커지고 가격도 지나치게 비쌀 것 같아서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좀 엉뚱한 생각이기는 했지만 그 때는 그만큼 시청각 자료를 구하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다릅니다. 유투브에 검색어만 치면 다양한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목사님들이나 이슬람 이맘의 설교, 찬양, 인도네시아 팝송도 다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인터넷 사이트에서 인도네시아 방송을 직접 볼 수도 있습니다. 옛날 처음 공부하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자료가 부족해서 언어 공부를 할 수 없다는 말은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자료가 많아지니까 오히려 게을러져서 예전만큼은 열심히 공부하지 않게 되더군요. 

한참 뒤의 일이지만 회사 내에서 인도네시아 지역을 담당하는 부서에 있었던 것도 인도네시아 말이 느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공문이나 보고서 등에 사용하는 다소 고급스러운 어휘들도 많이 익힐 수 있었습니다. 평소에 일과 공부와 사역을 한꺼번에 할 수 있다면 이상적일 거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 이상에 좀 근접했던 것 같습니다. 인도네시아어로 된 뉴스나 문서를 읽고, 현지에 출장을 가서 공무원이나 관계자들을 만나는 일들은 재미있기도 했고 인도네시아 언어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요즘 인기있는 JTBC '비정상회담‘ 이라는 프로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는 타일러라는 미국학생이 있습니다. 이 학생은 서울대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한국말도 잘하고 왠만한 한국인들보다 한국역사에 대해 더 잘 압니다. 주한 외국인 유학생들이 만드는 한국어 웹진 편집장이기도 합니다. 외국인이 한국문화에 대해 이 정도로 알고있고 애정이 깊다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타일러에게 호감을 갖게 만듭니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일부러 어려운 한국어만 골라 하는 거 아니냐는 질문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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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자기가 한국말을 대화를 통해 배운 것이 아니고 책을 보고 배워서 어려운 말을 쓰는 경향이 있다는 답이었습니다. 꼭 제 얘기 같았습니다. 저도 인도네시아어를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 배워서 꽤 어려운 어휘나 약어 같은 것은 잘 아는데, 막상 길에서 쓰는 일상 언어들은 한 번에 못 알아 듣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말레이시아에서 공부할 때의 일입니다. 말레이어와 인도네시아어는 한 80~90% 정도 비슷하지만 발음이나 어휘에서 차이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국영어와 영국영어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느날 인도네시아 친구랑 점심을 먹으러 나갔습니다. 밥과 여러가지 반찬을 종이에 싸 주는 노점에서 밥을 샀는데 숟가락을 안 주길래 친구에게 ‘숟가락은 안 주나?’ 하고 물었습니다. 숟가락은 인도네시아어로 ‘센독(sendok)' 이라고 하니 당연히 친구에게는 ’센독 안주나?‘ 이렇게 물었겠죠? 그 친구가 주인에게 물어보라길대 주인에게는 ’수두(sudu)는 없나요?‘ 하고 물었습니다. 말레이어로는 숟가락이 수두거든요. 옆에 있는 인도네시아 친구가 ’와, 난 센독 없냐고 할 줄 알았는데‘라며 놀랐습니다.  제가 타일러가 된 것입니다. 별 게 아닐 수도 있지만 센독과 수두를 상황에 맞게 바꿔 쓰는 한국인이라니,,

인도네시아 친구들이 저를 다른 친구에게 소개시켜 줄 때 ‘ 이 친구는 한국사람인데 인도네시아 한 달 갖다 와서 인도네시아 말을 이만큼 한다. 너 한국 한 달 갖다와서 한국말 이만큼 할 수 있냐?’ 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말레이시아에서 만난 인도네시아어를 하는 한국인이라니.. 저는 만날 때부터 50점은 먹고 들어가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