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철호(미션파트너스 상임대표) 물 한잔 먹을 수 있나요? 오랜만에 집에서 쉬고 있는데 아파트 벨이 울렸다. 빠끔히 문을 열어보니 웬 여자 둘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네! 좋은 말씀을 나누러 왔습니다.” 이런 경우 대분 전도하러 온 사람들이다. “무슨 말씀인데요?”라는 나의 질문에 그 중 한 여자가 “아! 네, 불교에 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내가 즉각적으로 “저희는 교회 다닙니다'”하고 문을 닫으려하자 그 중 한 여자가 문고리를 잡으면서 ” 아! 교회 다니시는군요! 교회 다니는 것도 참 좋은 일이죠.” “아 그런데, 저 물 한 컵 얻어먹고 갈 수 있나요?” 축호전도를 해본 나로서는 이것이 집안으로 들어오기 위한 1단계 작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냥 문을 닫으려고 하자, 옆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던 아내가 ‘그냥 물 한 모금 얻어 먹겠다는 데 들어오게 하지 그래요’라고 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문열 열어 주었다.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서 아내가 건 내 준 물 한 컵을 마시고 있는데, 그 중 나이든 여자가 말하기를 ” 저기.. 제가 화장실이 급한데, 화장실 좀 쓸 수 있을까요?” 나는 이것이 집안으로 들어오기 위한 다음 단계 작전이라는 것을 즉각적으로 눈치 챌 수 있었다. 하지만 화장실이 급해서 사용하겠다는 사람에게 매정하게 나가라고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거실 안으로 들어왔고, 나이든 여인이 화장실을 쓰는 동안 물을 마시던 젊은 여인은 ‘집안이 아름답네요’라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식탁에 앉는 것이 아닌가! 기왕에 이렇게 된 김에 한번 붙어보자(?)라는 욕심이 슬그머니 생겼다. 대화가 시작됐다. “불교에 대해서 말하려 오셨다고 그랬죠? 천태종입니까? 조계종입니까?” 나의 공격적인 질문에 그들은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 “예, 불교, 좋지요. 석가모니가 우리에게 좋은 진리의 말씀을 많이 남겨주시고 갔습니다. 참, 아저씨는 교회 다닌다고 했죠? 좋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사랑의 진리의 말씀을 전하시고 돌아가셨죠. 또 공자님도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많이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저씨, 성경에도 그렇고, 불경과 공자님의 글에도 장차 동방의 한 나라에서 진리의 빛이 오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과 석가모니와 공자님 세분을 다 합해 놓은 참 진리이신 그 동방의 빛이 이제 한국 땅에 오셨습니다.”라고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즉각적으로 이들이 어떤 이단 집단에서 왔구나하는 생각을 하게됐다. “그 사람이 도대체 누군데요?” 내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어보자, 나이든 여자가 말을 이어갔다. ” ‘강증산님’입니다. 그 분이 오늘 미륵보살로 이 땅에 다시 오신 것입니다.” “아! 증산도군요?” 내가 말하자, 그들은 반가운 얼굴을 하며 “증산도에 대해서 아세요?”라고 반문했다. “아니요, 잘은 모르지만 그냥 들었습니다.”라는 나의 진지한 대답에 그들은 식탁의 의자를 당겨 앉으면서 내게 증산도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내가 예수 안 믿는 사람이라는 입장에서 그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기 시작했다. “삼신 할머니를 아시죠?” 그런데 문제는 이 시점에서 생겼다. 내가 그들의 말에 주의를 기울려 듣는 것 같은 분위기를 파악한 그들은 나에게 결정타를 던진 것이다! 우리도 전도할 때 상대가 내가 전하는 복음에 관심을 보이는 것 같이 보이면,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설득력있는 결정적인 말을 던지듯이… 젊은 여자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 ‘삼신 할머니’라는 말 들어보셨죠? 왜, 어른들이 옛날부터 ‘삼신 할머니’가 우리를 지켜주신다고 하자나요!””예, 들어 보았습니다.””그렇죠! 그게 바로 장차 오실 구세주 ‘강증산’님을 말하는 거예요. 예수님, 석가모니, 공자님 세 사람이 다 모아져서 한 사람 ‘강증산’님으로 나타날 것을 이미 알고 ‘삼신(三神)할머니’, ‘삼신할머니’하고 옛 어른들이 말씀하신 것이에요. ‘강증산’님이 바로 모든 진리를 다 포함하신 분이세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너무 황당해서 뒤로 넘어가는 줄 알았다. 내가 너무나 어처구니 없어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말라고 하자, 내가 황당해 하는 표정을 보고 그들은 내가 왜 이 말을 믿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오히려 의아해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나이든 여자가 또 말을 꺼냈다. 이것은 첫 번째 결정구가 먹혀 들어가지 않자 그 동안 간직하고 있던 비장의 무기를 꺼내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나이든 여자는 우리 집안을 한번 흩어 보고 나서 말하기를 “이 집에 아기가 있나요? 아기가 태어나면 제일 처음 배우는 것이 무엇이죠? ‘도리도리 짝짝꿍’ 아세요? 우리가 아기들에게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것이 ‘도리도리 짝짝꿍 이죠? 왜 그런 줄 아세요? 그건 말이죠, 이제까지 각기 있었던 불교, 기독교, 유교의 도(道)와 도(道)가 ‘강증산’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짝짝’ 맞아떨어지게 된 것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가 오래 전부터 아이들에게 ‘도리(道理)도리(道理) 짝짝꿍’이라고 했던 거예요!” 그 순간 나는 정말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너무나 황당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이 순간 이후 그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돌변했다. 아무리 내가 예수 안 믿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해도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예화를 드는 바람에 그들에 대한 나의 최소한의 신뢰가 깨지고 말았다. 나는 그들을 내보내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저, 다른 데 가서 증산도를 설명할 때 다른 말은 다해도 좋은데, ‘삼신 할머니’와 ‘도리도리 짝짝꿍’은 말하지 마세요!” 나의 말을 들은 그들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둘이서 무어라고 중얼중얼 거리면서 문을 나섰다. 오늘의 키워드(Key Word) 그들을 보낸 뒤 갑자기 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들이 내가 보기에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예화를 들어 자신의 종교를 설명하다가 나에게 쫓겨났는데, 과연 그 예화가 정말로 황당한 것인가? 그들은 전문적으로 전도훈련 받은 사람들이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 계산되고 준비된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예화로 들은 이야기들도 이미 준비된 것이다. 여러 번의 임상실험을 통해서 확인된 예화라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하면 일반 사람들이 그 예화를 들으면 넘어간다는 의미다. 나는 갑자기 문제가 심각함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다원주의’다. 오늘날 문화의 키워드(Key Word)는 다원주의다. 문화적으로 그렇고 종교적으로도 그렇다. 문화적으로 다양함을 추구하는 오늘의 사회는 절대적인 가치에 대한 인식이 살아지게 됐고 그 결과 종교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도 한가지 진리를 말하는 것보다는 진리인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종교에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다. ‘삼신 할머니’ 이야기나 ‘도리도리 짝짝꿍’이야기가 일반 사람들에게 먹혀 들어간다는 것은 이런 다원주의 문화가 일반인들의 종교적 선택에 영향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의미다. 우리의 창조적 과제오늘날 기독교 선교에 있어서 우리가 돌파해야 할 과제가 바로 이것이다. 주요 타 종교 집단인 불교, 힌두교 등은 범신론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또 오늘날 새로운 선교적 과제로 등장한 구 서구권의 후기 기독교 사회 지역과 대부분의 현대문화의 영향권에 있는 지역의 문화적 특징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다원주의다. 이에 반해서 우리가 전달하려는 기독교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진리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없다는 한가지의 절대적 가치와 진리를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는 기독교의 ‘유일성’, 혹은 ‘절대성’이지만 일반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는 기독교가 가진 ‘배타성’이 된다. 오늘날 세계의 문화적 특징은 ‘유일성’ 혹은 ‘절대성’을 배격하는 문화이다. 세계화와 문화적 개방이 만들어낸 문화다. 다양한 것이 좋고, 다양한 입장을 서로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문화이다. 절대적 가치보다는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것을 선호한다. 오늘의 선교 대상지역인 서구권은 문화적 다원주의이고 2/3세계 권은 종교적 다원주의의 영향 아래 있다. 만일 이것이 오늘의 문화적 패러다임이라면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기독교는 ‘오늘의 다원주의 문화 안에서 어떻게 기독교의 유일성을 들어낼 것인가’의 과제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종교적 다원주의 지역인 인도에서 오랫동안 선교하다가 본국인 영국으로 돌아온 네슬리 뉴비긴(Nesile Newbegin)이 오래 전에 언급한 것이다. 자신이 선교사가 되어 영국을 떠날 때인 1900년 초 영국은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는 문화였으나 수 십 년이 지나 돌아와 보니(그는 인도에서 은퇴하여 영국으로 돌아오기까지 한번도 귀국하지 않았다) 영국 사회는 이미 다원주의로 넘어간 상태였다. 그의 고민의 결과는 ‘다원주의 복음의 유일성'(Gospel in the Pluralistic Society/ IVP에서 번역 출판)이라는 대안을 내 놓게 됐다. 이러한 도전에 대한 실천적인 대안작업으로 현재 영국과 북미에서는 ‘Gospel In Our Culture’운동이 일어나 다원주의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어떻게 주장하고 전달 할 것인가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오늘의 선교적 과제는 어떻게 우리가 창의적인 생각을 통해 다원주의 문화 안에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주장 할 것인가와 함께, 이것이 우리들 삶 속에서 어떤 문화적 표현으로 혹은 삶의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가에 대해 고민하고 대안을 만들어 가는 것이 되야 할 것이다. 이 작업은 오늘 우리가 사는 한국의 문화 안에서 먼저 일어나야 한다. 타 문화권이라는 선교지로 가지전에 먼저 우리 문화 안에 있는 다원적 현상에 대한 이해와 대응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복음의 절대적 가치가 어떻게 전파되고 가치가 요구하는 데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확인해 보아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