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이전과 이후 사람들은 오늘날 미국의 상황을 9.11이전과 9.11이후로 나눈다. 모든 것이 9.11사건을 기점으로 바뀌었다.정치, 경제 외교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심리적 상태 등 삶의 모든 것이 바꿨다. 이제까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미국의 심장부에서 수 천 명의 사람들이 테러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9.11 이후에 미국을 여행해 본 사람이라는 당장 미국 공항을 통과하는 것이 엄청나게 번거로워졌음을 알게 된다. 미국 상원의원도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기 위해 바지를 벗어야 했다는 기사도 났다. 얼마 전 미국의 한 공항에서는 검색대의 직원이 너무 피곤해서 잠시 졸았던 것이 밝혀지자 공항이 24시간 동안 폐쇄된 적도 있다. 이 모든 것이 테러 때문이다. 오늘날 테러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 세계가 테러공포 가운데 있다. 알카에다의 소행을 추측되는 스페인 열차 폭파 사건, 알카에다와 동맹내지 연합 전선을 구축하고 있는 동남아 지역의 대표적인 테러 단체인 제마 이슬라미아(JI)에 소행으로 추측되는 인도네시아 발리 디스코텍 폭파사건 등 전 세계가 테러리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미 한국도 테러 대상국가가 되었고, 얼마 전에는 이라크 파병으로 인해 알카에다로부터 구체적인 테러 경고를 받기도 했다. 알카에다의 2인자인 알 자와히리가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에 대한 테러 공격을 촉구하는 비디오가 알자지라 방송에 공개되었고, ”알 마스리 순교자”라는 이슬람 단체가 한국정부가 자이툰 부대를 철수시키지 않으면 한국군과 한국 내 시설물을 공격하겠다는 협박을 한 바 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한국에서 간 선교여행팀이 아프칸에서 피납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정치적 목적으로 일어나는 테러와 납치 등이 한국에도, 더우기 기독교인들에게도 오늘의 문제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테러에 대한 이중적 관점 문제의 핵심은 폭력의 정당성이다. 테러를 가하는 자들은 테러행위를 통하지 않고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정당한 목적이나 자신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자들을 물릴 칠 수 없다는 근거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러한 테러행위를 제거하거나 대항하는 수단으로서 폭력 사용에 대한 정당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9.11사건을 일으킨 오사마 빈 라덴은 이미 1990년대 말에 발표한 두개의 선언문에서 미국을 대상으로 하는 자신의 테러활동의 정당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 전쟁 선언(1996년 10월)’과 ‘유대인과 십자군에 저항하는 세계이슬람전선의 성전(1998년 2월)’등 두 개의 문건에서 빈 라덴은 자신이 해석한 지하드(성전) 이론에 따라 어떤 수단으로든 미국인을 죽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을 펴왔다. 대미항쟁 선언문(1996년)에서 그가 발표한 대미 지하드 선언은 “십자군 세력(미군)이 우리의 비참한 상황을 낳은 주요원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문건에서 빈 라덴은 사우디에 있는 미군 기지를 지칭하면서”7년 넘게 아라비아의 성지를 점령하고 있는 미국은 자원을 약탈하고, 이웃 이슬람국을 겨누고 위협하는 창끝으로 아라비아 반도의 미군기지 들을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 세계 범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뭉쳐 아랍권에서 미국과 서방세력, 그리고 이스라엘 등 비이슬람 세력과 세속적인 이슬람 정부를 몰아내자고 주장하고 있다. 즉 빈 라덴에게 있어서 미국을 향해 테러전쟁을 벌리는 것은 미국이 자신의 조국인 사우디를 비롯해서 범이슬람권을 지배하고 점령하고 있는 것에 대한 방어 혹은 저항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즉 빈 라덴의 목표는 미국을 파괴하는 일이고 그 이유는 미국이 자신의 조국인 사우디와 이슬람국가들을 착취하고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미국의 의도가 중동에서의 주도권을 계속 유지하고 이를 바탕으로 석유자원에 대한 지속적인 지배와 세계 정치 경제의 주도권을 유지하겠다는 것이므로, 이러한 강력한 힘을 가진 미국에 저항하는 방법은 테러밖에 없다는 것이며 이것은 정당한 행위이며 종교적이며 신성하기까지 한 행위로 간주되는 것이다.
한편 빈 라덴으로 대표되는 이슬람 테러리즘에 대항하는 미국은 이러한 테러리즘에 대항하여 자국의 국민과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여 테러리스트들을 제거하는 일은 너무나 당연하고 정당하며 공의로운 일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과연 테러와의 전쟁이 얼마나 효과적인지에는 회의론이 지속적으로 등장했지만 부시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시작할 때 대다수 미 국민들이 지지했고 전쟁 중에는 장수를 바꾸지 않는다는 캠페인으로 재선에 성공한 부시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테러를 응징하고 차단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국민들로부터 확실히 얻어냈다고 볼 수 있다. 왜 그들이 미국을 향해 테러를 할 수 밖에 없었던가에 대한 자기 성찰의 시간이나 기회도 가질 틈도 없이 그들의 눈앞에서 그들의 힘과 경제력의 상징인 무역센터와 펜타곤이 공격당하고 자신의 가족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이러한 테러에 대한 응징의 수단으로 폭력을 동원하는 것은 너무나 정당하고 당연한 일로 이해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한국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파병문제가 한창 대두되기 시작할 때 대부분의 여론은 남의 나라의 싸움에 우리의 젊은이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파병의 정당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선일씨 참수 사건이 이러나고 잠시 동안 이었지만 여론은 완전히 반전되었다. “전투병을 빨리 보내 싹 쓸어버리자.” “대한민국에 대한 테러를 용서하지 말자.” 김선일씨 참수 소식과 함께 이라크 저항세력에 보복을 가하자는 여론도 들끓기 시작했다. 보수 세력의 논객들은 “보복을 못하면 국가도 아니다”는 논리로 파병을 선동하기 시작했다.미국의 대 테러 전쟁의 타당성에 대해 회의하던 이들도 우리를 테러한 이들에 대한 응징으로 폭력을 동원하는 것의 정당성을 일시적 이나마 인정하게 된 것이다.
폭력이 정당화되는 이유 이 문제를 풀어 가는데 있어서 난관은 그것이 국가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던 한 국가 안의 다른 집단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던 내적 구성원이 아니라면 도저히 동의하기 힘든 테러와 같은 수단들도 내부적으로 정당화되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집단 내의 많은 구성원이 공감하는 공통의 적이 존재하고 민족적 생존 혹은 침략과 저항의 카테고리가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에 저항하여 폭탄테러를 하는 사람들은 폭탄이 누구를, 몇 명을 죽였든 순교자로 대접받는다. 그리고 이에 대응해서 막강한 무기와 힘을 가지고 그들을 살해하고 압제하는 이스라엘 군대들도 더 이상 내적인 갈등을 격지 않게 된다. 실제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우려한 것은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근본주의자들의 영향력 확대였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경우 힘이 없는 저항집단에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정당성을 가진다고 본다는 것이다 . 예를 들면 일본 통지 하에서 우리가 독립을 위해 저항했던 수단이 바로 테러였다. 소위 말하는 열사들의 행위는 일본군 대장을 살해하기 위해 평화로운(?) 행사장 폭탄을 투척하는 것이었고, 우리들은 역사를 공부하면서 특정한 한 사람을 살해하기 위해 선량한 많은 사람이 죽을 수 있는 폭탄 투척이라는 테러 수단에 대해서는 논의 하지 않고 그 열사의 애국심에만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집단 내부에서는 비록 그것이 테러라는 폭력적 형태를 가지긴 하지면 오히려 선을 향한 더 적극적인 저항의 모습으로 평가되고, 테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은 선을 위해 희생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테러라는 폭력의 명분이 저항해야 할 이유를 제공한 세력이나 집단에게 기인 한다는 논리가 더 현실적이며 설득력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저지른 테러를 자성적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민족적 저항이나 주권 수호를 위한 행동이 절대적인 명분을 지니는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적 입장이 팽배한 상태에서 테러리즘 등 저항을 위한 폭력 사용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은 불가능하며 이미 폭력의 내부적 합리화와 그것을 지지하는 정당성 모두를 인정한 상태이기 때문이다”라고 보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가 매우 민족(종족)이나 국가 단위화 되어 있고 따라서 오늘의 현실에서 같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개념을 뛰어넘어 개인의 인권을 위한 보편성이나 동등한 가치를 찾는 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지 않는 한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혹은 종교와 종교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폭력적 행동을 정당화하는 일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1)
기독교인과 테러리즘 기독교와 테러 혹은 폭력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이 문제에 대해 성경은 하나의 분명한 답을 말하기 보다는 전쟁과 같은 힘의 사용에 대해서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는 비폭력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많은 부분에서는 공의를 위해 힘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교회나 교리에 의해서 일정한 조건에 의해 정의를 위해 폭력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인정되어 왔다. 대표적인 경우가 ‘공의로운 전쟁’(just war)에 관한 이론이다. 이 이론은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등에 의해 발전되어 왔는데, 이 이론은 전쟁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만일 필요하다면 전쟁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이 땅에 평화를 추구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교회는 일반적으로 이 입장을 취해 왔고 어떤 경우 던 힘을 사용하지 않는 완전 평화주의자의 입장은 기독교 초기를 제외하고는 매우 작은 소수 사람들이 취해 온 입장이다. 공의로운 전쟁은 이 전쟁이 정당한 권력 혹은 권위에 의해서 수행되어야 하며, 전쟁 시 정당한 방법만을 사용해야 하며, 전쟁의 목적은 정의 혹은 더 낳은 공의를 목적으로 해야 하며, 전쟁이 최후 수단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조건을 누가 판단하고 정하는가의 문제이다. 공의로운 전쟁은 공격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방어를 위한 전쟁일 때만 가능하다고 할 때 과연 빈 라덴이 뉴욕의 무역센터를 폭파한 것이 공격을 위한 행동인가 아니면 더 이상 미국이 아랍세계를 지배해자 못하도록 방어하기 위한 행동이었는가? 또 반대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공격한 것이 또 다른 테러를 막기 위한 방어였는가 아니면 자신들의 중동에서의 기득권을 유지하가나 확장하기 위한 공격이었는가에 대한 판단은 누가하는가?혹 이런 판단을 하는 주체가 있다면 과연 그 주체는 공정한 위치에서 판단할 수 있는가? 판단하는 주체가 전쟁의 당사자들을 압도할 수 있는 권위와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전쟁 당사자들이 그 말을 듣겠는가 등 여전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공의로운 전쟁“의 실행의 정당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리고 실제 교회 역사 속에서 교회가 전쟁에 참여했을 때 이 원칙에 따라 이뤄진 적은 거의 없다. 실제 오늘날 대부분의 분쟁의 사상적 대립인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립은 12세기 기독교도들에 의한 이슬람에 대한 침략인 십자군전쟁에 그 모태가 있다고 본다면 그 원죄는 기독교인들에게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교회 역사 속에서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문제를 해결한 적은 거의 없다. 오히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승리는 마틴 루터 킹목사나 기독교의 비폭력 사상을 도입한 간디의 비폭력저항을 통해서 획득한 것들이다.
비록 기독교인들이 전적인 비폭력과 평화적 태도만을 보인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은 기독교인만 사는 공간이 아니므로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게 된다. 문제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온 인류가 어떻게 철저히 민족(종족)이나 국가단위를 초월해서 개인의 인권을 위한 보편성이나 동등한 가치는 실제적으로 어떻게 찾을 것인가의 문제이며 이 일을 위해 교회가 혹은 성도들 개인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과연 기독교가 민족이나 국가의 개념이나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 하나님 형상으로 창조된 모든 인간이 가지는 보편성과 동등성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알리며 보여 줄 수 있는가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1) 권인숙, 폭력은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한겨레 21, 2004년06월30일 제516호
-9월 22일, 2008 |
미션파트너스 상임대표 한철호 선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