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슬리 뉴비긴은 20세기 서구 교회가 낳은 위대한 사상가이며, 교회연합운동의 선구자이며, 동시에 선교사였다. 1909년 영국 뉴케슬에서 태어나 당시 번창하는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 갈 것으로 기대했었으나 대학에서 기독학생운동(SCM)에 참여하면서 회심을 경험하고, 졸업 후 SCM 간사사역을 거쳐 신학을 수업을 한 후 1936년 인도에 선교사로 가게 된다. 그는 인도에서의 사역을 통해 다양한 신학적 배경을 가진 교회들을 연합하여 남인도 교회라는 하나의 교회 공동체를 만들어 감으로서 교회의 일치라는 그의 선교 신학적 토대를 실천하게 된다. 이러한 사역적 배경은 그 후 국제선교협의회(IMC)와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사역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실천적 배경이 되기도 한다. 특히 그는 IMC와 WCC를 통합함으로서 선교와 교회가 구분 될 수 없음으로 증명하기도 했다. 뉴비긴의 “교회란 무엇인가”는 이러한 신학적이고 실천적 경험을 통하여 1952년에 한 강연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비록 50년 전에 출판된 책이지만, 오늘날 교회에도 절실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한편 1974년 인도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영국으로 완전히 돌아 왔을 때, 그에게는 충격적인 현실이 눈앞에 있음을 발견하게 되다. 그것은 바로 자신에게 하나님의 유일성을 알게 해준 영국 사회가 더 이상 기독교 사회가 아니라 완전히 세속화되고, 더 이상 기독교 진리는 그 문화의 중심에 존재하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오히려 인도보다 더 반 기독교적임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러한 후기 기독교 세속 사회 안에서 복음이 다시 그 위치와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선교사의 시각으로 고민하게 된다. 그 고민의 결과를 많은 책으로 출판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최근 뉴비긴의 도전에 영향을 받은 후학들이 그의 사상과 도전을 실제 현재의 서구 교회를 개혁하는 구체적인 패러다임으로 사용하면서 새로운 교회개혁운동을 시작 한다. 그것이 1998년에 출간된 Missional Church: A Vision for the Sending of the Church in North America 라는 책으로 시작된 missional church 운동이다. Missional church 운동은 ‘선교적 교회론’이라고 번역되는데, 사실 이 번역은 missional church에 대한 정확한 의미는 아니다. missional church는 단순 ‘선교적 교회론’ 혹은 ‘선교하는 교회’라는 의미라기보다는 교회의 본질적 DNA가 무엇인가를 들어내는 표현이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보내심을 받은 공동체, 즉 선교적 본질을 가진 공동체라는 것이다. 교회는 삼위 일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 즉 missio Dei(보내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이다.(요17;18, 20;21) 즉 교회는 보내심을 받은 존재이고 따라서 본질상 선교적 존재이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의 문화 속으로 보내졌으며, 그리스도인이 세상 안에서 보내심을 받은 자들로서의 삶을 살아갈 때에만 교회 본래의 모습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본질적으로 선교적(보내심을 받음)이라는 것은 지리적 영역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지리적으로 확장하는 것만 아니라, 사람들의 모든 삶의 영역에 그 영향력을 미쳐야한다. 이것은 복음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서구 사회가 비록 복음을 지리적으로 온 세상에 전파하는 일을 하긴 했지만, 실제 서구 사회 안에서 복음이 삶의 전 영역에서 진리의 위치를 가지는 일에 실패하고 있는데, missional church운동은 다시 복음이 그 사회 안에서 그 본래의 위치를 회복하게 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missional church운동은 본질적으로 해외 선교적 의미 보다는 오늘날 서구 문화 안에서 복음이 그 위치를 상실한 상태를 회복하자는 운동이지만, 포괄적인 의미에서 교회의 선교적 회복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서구교회의 이러한 자각은 서구 교회 역사를 세 흐름, 즉 313년 콘스탄틴 이전의 시대(Pre-Christendom), 기독교왕국시대(Christendom) 그리고 오늘날의 후기 기독교시대(Post-Christendom)으로 구분하는데, 오늘날 후기기독교 사회의 현상은 마치 콘스탄틴 이전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기독교가 오히려 사회와 문화 안에서 소수자이며, 문화 중심에 있기 보다는 문화 주변으로 물러나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콘스탄틴 시대 이전의 소수자였던 교회가 보내심을 받은 공동체(missional church) 역할을 충실히 감당함으로서 당시 거대문화였던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할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 소수자 혹은 주변 문화로 물러나 있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의 본질, 즉 보내심을 받은 자(missional church)의 DNA를 가질 수 있다면, 교회는 다시 오늘날의 세속 사회를 복음으로 회복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missional church 운동은 ‘복음과 문화 네트워크’(GOCN, Gospel and Our Culture Network)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편 최근 선교계에서 missional church 개념을 ‘선교적 교회론’이라는 좁은 의미로 적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선교운동가들이 더욱 그런 경향이 있다. 물론 한국에서도 missional church 운동에 관심 있는 이들이 모이고 서로 사역적 연대를 구성하고 있기도 하다. 이들은 missional church 개념을 선교적 교회론의 관점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보내심을 받은 교회’라는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이 두 접근은 결국 하나의 시각으로 통합될 수 있다. 즉 교회는 보내심을 받은 공동체 인데,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지리적으로 해석 할 때 선교적 교회론의 접근 할 수 있고, 교회의 영향력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할 때는 삶의 모든 영역의 복음화라고 접근 할 수 있다. 즉 교회는 지리적으로든, 그 영향력으로든, 모든 측면에서 보내심을 받은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세상의 모든 곳과 모든 문화 안에 주되심의 들어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두 개념을 서로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방안으로 missional church라는 개념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뉴비긴의 교회론을 올바로 이해하는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뉴비긴은 선교사로서, 변증가로서 혹은 기독교 사상가로서 이러한 통합적 관점으로 교회의 존재를 이해했다. 따라서 필자는 본 논고에서 이러한 통합적 관점에서 “교회란 무엇인가”에서 뉴비긴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요약하고 이를 오늘날 유럽의 한인교회 공동체에 적용해 보고자 한다. 뉴비긴의 교회의 본질에 대한 이해 뉴비긴은 교회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이들이 성례에 참여하는 통일성과 연속성을 가진 가시적 공동체로 보았다. 뉴비긴은 믿음의 고백만을 강조하는 복음주의권 교회가 가시적 공동체로서 교회의 연합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런 점에서 개신교가 참 교리의 연속성과 역사적 유기체의 연속성을 서로 대립시켜 교회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평가 절하 해 왔다고 비판한다. 물론 그렇다고 교회의 가시적 연속성을 캐토릭의 베드로의 교황권 승계에 있다고 보기 보다는 목사 직분의 계승은 안수의 계승에 달려 있지 않고, 복음의 전체성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에 달려 있다는 입장을 지지한다. 개신교 교회론의 결함은 교회는 단순히 복음전파와 성례 집행이라는 사건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의 참 본질은 그것이 연속성을 지난 역사적 공동체성, 곧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단 한 번 구성되고 파송된 사회(공동체)라는데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교리 중심의 개신교를 비판했다. 믿음이라는 단어를 너무 지나치게 지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문서로 작성된 신학적 진술이 교회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과 그리고 다른 신자와 하나가 되는 일은 지적인 동의보다 훨씬 깊은 차원의 것으로 보았다. 그는 개신교회가 연합되기 보다는 분열되는 이유는 여기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 편에서의 믿음과 하나님 편에서의 사랑이라는 통일성 안에서 지적으로 의견을 달리하는 일은 얼마든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교회의 하나 됨은 단순히 이념적이거나 영적인 것에 불과하지 않고 가시적이고 사회적이며 유기적이라고 본다. 즉 교회의 본질은 분열되지 않은 연속적인 친교에 있다고 보았다. 교회가 하나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권위의 전수가 연속적으로 일어난다고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뉴비긴은 가톨릭과 정통 개신교가 아무리 달라도 의견을 같이하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즉 가톨릭은 주어진 구조에, 개신교는 주어진 메시지에 각각 일차적인 강조점을 두지만, 양측 모두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시는 구원 사역의 독특성, 충분성 그리고 궁극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수호 하려고 하고 있다고 보고 이런 측면서 두 진영이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양측 어느 한 곳으로만 혹은 양측의 주장을 단순히 합해 놓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가톨릭의 핵심적 신념은 교회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도구라는 것이고, 반면에 개신교는 성도 개개인이 전하는 메시지가 구속의 도구라고 본다. 온전한 교회의 정체성은 이 두 입장의 긴장 속에서 발견되기 보다는 새로운 항목이 추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둘을 통합할 수 있는 제 3의 흐름으로 에큐메니칼 운동을 제시하고 있다. 즉 교회의 진정한 존재는 메시지와 구조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교회의 특정 구조나 교리 보다는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시는 역할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래서 “교회가 어디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성령이 능력으로 임하는 곳이 어디인가?”라고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흐름을 묘사할 만한 단어를 찾지 못한 뉴비긴은 이를 오순절운동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하고, 그 근거를 사도행전에 이방인들 가운데 교회가 탄생할 때 보여진 성령의 임재(세례)여부가 그것을 증명한다고 본다. 즉 성령 임재의 선물은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영접하셨음을 보여 주는, 가시적이고, 즉시 알아 볼 수 있는 틀림없는 표지로 보았다. 교리적으로 접근 할 때는 창조, 성육신, 속죄 등을 다룬 다음에 성령을 논하게 되지만, 신약성경에서는 성령이 하나의 실재로,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키는 인식 가능한 증인으로 등장한다. 이것이 교회의 들어나는 표지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교회 존재와 성령과의 불가분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뉴비긴은 교회를 살아 있는 유기적이고 가시적 공동체라고 보고, 예수께서 물리적으로 그의 교회와 함께 있지 않는 오늘의 상황에서 성령의 임재와 성령의 교회를 교회되게 사역하심을 통한 교회의 가시적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에큐메니칼운동이 오순절파를 포함할 것과 개신교와 캐로릭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에큐메니칼운동이 교착 상태에 빠진 것은 성령론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은 행15장의 예루살렘 공회의 결정과 유사한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교회가 성령공동체라고 말할 때, 이것은 성도들 간의 코이노니아를 배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코이노니아는 질서와 하나 됨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가 지역교회 (성공회의 교구교회와 같은 지역성)의 개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오늘의 개신교들은 경청해야 한다. 물론 오늘날 도시 중심의 이동성이 강하게 요구되는 상황에서 현대사회 안에서 이것이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는 다른 숙제일 수 있다. 결국 뉴비긴은 초회중적인 교회(대형교회)를 우려하고 있고, 신약성경에는 초회중적 교회의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분권화의 과정을 통해서 더 작은 교회 조직으로 가는 방향을 지지하는데, 이것은 교회의 일치와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참 본질 및 특질의 회복과 관련된 것으로 곳곳에서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의 가시적 친교 모임이 되는 것을 교회는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뉴비긴의 교회와 선교에 대한 이해 뉴비긴이 주장한 교회의 본질은 사도적 신앙을 보유하고, 세상을 향해 사도적인 선교 사역을 수행하는 사도적 교회가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뉴비긴은 교회는 종말론적 관점에서 보아야 제대로 이해 할 수 있다는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은 사도적 교회(apostolic Church = missional church) 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도록 주어진 시간이다. 참된 종말론적 관점의 함의는 선교 사명에 대한 순종이다. 따라서 그런 순종을 낳지 않는 종말론은 그릇된 종말론이라고 뉴비긴은 말한다. 만물의 최종적인 완성에 대한 소망과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즉 재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주어진 시간 안에 이루어지기 위해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사 증인되겠다고 하신 약속이 성취될 것이고, 이것을 위해 증인으로 부름 받은 사명을 가지는 것이 교회의 사도직이다. 즉 교회의 존재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재림이 완성되는 일이 존재 목적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즉 교회가 선교적 정체성을 일어버리면 교회의 이차적 본질뿐만 아니라 일차적 본질까지 상실하게 된다는 경고한다. 선교와 선택의 교리는 중요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뉴비긴은 어떤 사람이 왜 선택되었는지는 모른다 할지라도 무엇을 위해 선택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참 포도나무의 가지로서의 열매를 맺기 위함인데, 즉 그의 증언을 통해 다른 이들도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즉 하나님의 구원 목적이 하나님과 화해를 이룬 사람들 안에서 그리고 그 사람들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미쳐 그들도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게 하려는 것이다. 즉 그는 선택의 궁극적 신비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선택의 원리가 하나님의 구원 목적의 본질과 맥을 같이하는 유일한 원리로 보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선택 교리의 선교적 특성을 망각할 경우, 땅 끝까지 가서 하나님의 대사로 증언하는 일을 탐구하지 않고, 뒤로 물러나 하나님의 비밀스런 경륜을 탐구하는 데만 관심을 가지거나, 자신의 선택의 목적이 자신의 구원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위탁받은 것을 저버리는 것이 된다고 주장한다. 뉴비긴은 극단적 칼뱅주의를 경계한다. 그 이유는 중생에 있어서 성령이 비밀스러운 경륜에 따라 각 개인에게 구원이 주어진다는 교리에 전적으로 동의하나, 이 진리를 성육신의 진리와 무관한 독자적인 진리로 간주하면, 복음을 왜곡하는 것이 된다는 것 때문이다. 즉 성령이 각 사람에게 직접 주어진다고 믿으면, 그 분의 증언을 확증할 다른 출처인 교회 공동체와 혹은 선교사역 -직접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필요 없어지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개별적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선택된 것이고, 선택의 동기도 사도적 사명(선교적 사명)을 주기 위함이다. 따라서 가시적 교회의 삶이라는 맥락에서만 성령의 교리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은 집합적이고 우주적인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역사상 특정한 공간과 시간에 발생한 구체적이 사건을 통해서만 계시 될 수 있다. 즉 그 메시지는 그 메시지의 내용대로 조화로운 관계를 실제로 구현하는 어떤 공동체를 세움으로써 전달되어야 한다. 화해의 복음은 화해를 이룬 모임에 의해서만 전달될 수 있다. 따라서 선교가 진행되는 방법은 화해를 경험한 가시적 중심지(교회 공동체)에서 다음 중심지로 펴져 가는 형태로 이뤄진다고 이해했다. 뉴비긴은 교회와 선교회의 이분화에 대해서 ‘어처구니없는 현상’이라고 말한다. 그는 WCC와 IMC의 이분화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한다. (뉴비긴은 나중에 이 둘을 통합했다) 또한 지리적이고 점진적으로 하는 선교방식은 비성경이고 단번에 온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것이 신약성경의 전략이라고 본다(오늘날은 이런 전략이 더 가능한 시대에 와 있다!) 우리에게 무한한 시간이 있어서 교회가 서서히 퍼져 나가 마침내 온 지구를 뒤덮을 것처럼 생각한다고 비판한다. 또한 교회가 종말론적이고 선교적인 관점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자신들의 일차적 의무가 자기 교인을 돌보는 일이 되고, 바깥에 있는 자들에 대한 의무는 이차적인 것으로 밀려난다는 것이다. 이른바 교회는 돈을 받고 하는 목회 사역과 동일시되기에 이른다고 비판한다. 목양이 마땅하지만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세상을 향한 그분의 선교에 참여한다는 것이며, 진정한 목회 사역, 신앙훈련, 은혜의 방편의 사용은 모두 이 선교사역을 위해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강화(consolidation)는 진전의 대안이 아니라, 그 반대로 진전이 신앙 강화의 방법이 된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신앙강화’는 세상적인 방식에 따라 안정된 토대 위에 굳게 정착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뉴비긴의 주장은 오늘의 교회들이 깊이 새겨야 할 일이다. 또한 뉴비긴은 교회가 선교적 정체성을 잃어버리며 그 본질을 상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교회가 교회적 정체성을 지니지 않으면 사도적 사역을 대변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교회의 면모를 갖추지 않은 선교회는 선교적 성격을 지니지 않은 교회만큼 기형적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대다수 교인들이 교회가 일종의 선교적회가 되지 않고도 존속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교회의 본질에 어긋난다고 본다. 뉴비긴은 선교를 위한 교회의 연합에 대해서 교회가 종말론적이고 선교적 관점을 지녀야만 교회가 하나로 연합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교회의 연합은 세상으로 하여금 복음을 믿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교회는 존재의 본질성을 수행할 때만 그 생명을 유지 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선교를 위한 연합이다. 교회가 분열되어 있다면 이것은 복음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연합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자신이 죽음을 통한 속죄의 진리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라고 강변한다. 우리가 연합하지 않는 한 세상이 우리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선교 사역에 참여 할 때 진정한 교회가 되는 것은,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도직에 실제로 참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분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교회가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할 책임을 새롭게 수용하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우리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힘이 복음 안에 분명히 있음을 목격하지 않고는 세상이 이를 믿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선교와 연합은 불가분의 관계로 같이 추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뉴비긴은 결론적으로 첫째 모든 교회가 온 세상을 그리스도께 순종시키기 위해 선교의 책임을 새롭게 받아들이도록 요구해야 한다. 둘째,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협력해야 한다. 셋째, 모든 곳에서 교회의 재연합운동을 지치지 않고 열심히 추진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미션파트너스 상임대표 한철호 선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