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무와 쉼 이재진, GBT 들어가며 2004년 시작한 방콕 포럼의 첫 번째 주제는 책무였다. 첫 모임에서 선교와 책무를 다룬 이유는 당시 한국선교의 빠른 양적 성장과 그에 따른 헌신 및 열정에 비해 책무가 결여되거나 부족하여 사역지 곳곳에서 많은 문제점들이 심각하게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 선교와 책무는 선교단체나 선교사들의 모임에서 자주 거론되는 주제가 되었고, 주로 재정, 사역, 선교단체, 지역교회, 현지교회, 가정 등에 대한 책무에 초점이 맞춰졌다. 십여 년이 지난 방콕포럼은 2015년 주제로 선교와 정신건강을, 금년에는 이와 맞물려 건강한 정신건강은 건강한 쉼이 있어야 한다는 논지로 이어져 '쉼'을 주제로 정하게 되었다. 정신건강과 쉼의 연관성은 쉽게 짐작되지만, '책무'와 '쉼'의 관계는 무엇인가? 두 주제를 엮은 이유나 논리적 배경은 무엇인가? 선교사의 쉼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안식년이 아닐까 싶다. 문명의 이기와 동떨어지거나 본국의 문화 및 언어와 환경이 판이하게 다른 곳에서 사역하는 과정에 쌓이게 되는 스트레스, 자녀교육을 포함한 다양한 현실적 문제로 인해 누적된 고충을 안식년이라는 정기적 쉼의 기회를 통해 해소하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식년이 과연 쉼과 재충전의 기간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는 것일까? 쉼은 안식년 기간 외에는 누릴 수 없는 것인가? 쉼이란 무엇인가? 휴가가 쉼인가? 요즘은 안식년 대신 '국내사역'으로 개념이 바뀌었는데, 장소만 국내로 바꿔 사역을 계속한다는 개념이라면 공식적 쉼은 없는 것인가? 이런 질문들을 염두에 두고 이 글을 써본다. 안식일과 쉼 안식년 개념은 성경의 안식일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므로 우선 안식일과 쉼의 관계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필자는 이에 대해 남아공의 실천신학자이자 조직 신학자인 Volker Kessler의 글, 'The Sabbath as a remedy for human restlessness'를 인용해본다. Kessler는 현대 산업사회의 쉼이 없는 삶(restlessness)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한 가장 확실한 처방은 안식일 계명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는 쉴지니 밭 갈 때나 거둘 때에도 쉴지며(출 34:21)”라고 명하셨는데, 현대 그리스도인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중요시하면서 제4계명인 안식일 계명은 소홀히 다룬다고 꼬집는다. Kessler는 나아가 유대인은 안식일을 통합적으로 접근(holistic approach: time for both spiritual and physical or social refreshing)하는 반면, 현대 크리스찬은 이를 단지 영적인 의미로만 제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 2:2)”의 의미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여섯째 날에 끝났다기보다 일곱째 날에도 안식이라는 의도적 '일'을 하셨는데, 이 안식은 그분이 창조하신 세상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기쁨을 준 안식이며 창조사역의 마지막이 제7일의 안식까지 포함된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즉 안식은 단지 일이 끝나서 쉰다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대인은 즉각 이루어지는 것에 익숙한 삶, 또한 우선순위에 밀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이것은 선교사나 목회자뿐 아니라 모든 크리스찬에게 나타나는 일반적 현상이다. 이 현상의 문제는 무엇일까? 하나님은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기쁨의 안식을 누렸지만, 현대 크리스찬들은 한 가지 일을 마친 후 쉼이 없이 바로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 이후 누렸던 그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고 그 결과 심각한 문제, 즉 스트레스나 탈진 상황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Kessler는 인간이 진정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를 타락의 결과로 보면서 파스칼의 다음 글을 인용한다. "나는 종종 인간이 행복하지 못한 근본 원인은 그가 홀로 조용히 거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안식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안식을 두려워하는 존재인데 이는 타락의 결과다." 일벌레가 되어 쉼이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은 안식하라는 명령을 준행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측면으로는 하나님과의 깊은 소통의 부재 가운데 사는 것이기도 하다. 늘 바빠서 진정한 쉼의 결여로 하나님과 의미있는 소통이 단절되면 탈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선교사나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하나님과 소통이 없다면 기계적인 전달자로 전락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Eugene Peterson은 'Busyness'라는 글에서 기도와 깊은 묵상을 통해 남이 아닌 내가 경험한 예수님과의 관계를 설교해야 하는데 쉼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많은 사역자들이 이를 알고 있으면서도 실행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인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한 사례를 생각해보기로 한다. 사례 매년 2회 정기적으로 모이는 국제위클리프 이사회에는 행정대표와 부대표들도 참석하게 돼있다. 수년 전 국제이사회에서 이사장이 행정대표의 정례보고를 들은 후 대표진의 쉼이 충분하지 않은 사실을 지적하면서 의무적 쉼의 기간을 갖도록 명했다. 당시 가정적인 어려움을 포함해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던 대표는 이사회의 명에 따라 한 달간 안식월을 갖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4년마다 열리는 국제총회를 불과 달포 앞둔 시점이었다. 사역적 관점에서는 쉼을 갖기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이사회는 대표의 쉼과 회복이 국제총회를 준비하는 일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그의 쉼을 명했다. 안식월 기간 중 대표의 고유사역은 부대표들이 분담했다. 대표는 이 기간 이메일을 포함한 사역관련 통신(전화 포함)을 끊고 쉼과 재충전에 전념했다. 이 기간 대표에게 보내는 일상적 메일은 부대표들이 대신 받았고 긴급상황에 해당하는 메일만 대표에게 전달하거나 긴급전화로 교신하기로 했다. 대표는 일주일에 한 번 이메일을 열어 대표의 개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긴급사안에 한해 대처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연중 대부분 해외여행으로 집을 비워야 했던 대표는 이 기간에 집안 일(화단 만들기, 손자를 위한 놀이터 만들기, 집 수리 등)에 대부분의 시간을 사용했고, 분주함 때문에 소원해지고 관계가 힘들어졌던 20대 딸과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안식월을 마친 후 국제본부 지도자들의 모임에서 대표는 안식월 기간에 경험하고 깨달은 바를 진솔하게 나누었다. 선교단체의 지도자이자 한 가정의 남편, 가장, 할아버지로서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다양한 역할을 균형있게 감당하지 못한 데 대한 반성이 있었고 그 자리에 있던 지도자들 모두가 자신의 상황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뒤이은 국제총회 첫날 기조발제에서 대표는 관행적 사역보고 및 계획서 대신 (그것은 별도의 보고서로 대신했다) 안식월 중 하나님께서 대표를 책망하고 반성하게 하신 내용을 투명하게 나누며 공동체의 용서를 구했다. 국제단체 대표의 이 고백은 전 세계의 100여 단체를 대표하는 선교지도자들에게 긍정적 충격파가 되었고 위클리프 총회 사상 이렇게 은혜롭고 고무적인 모임은 처음이었다는 자발적 나눔이 일파만파 번져갔다. 그 이후 대표와 마찬가지로 국제본부 대표진 모두는 각자의 형편에 따라 3-4주간의 안식월을 가질 것을 명 받아 연차적으로 시행하게 되었다. 마침내 우리 차례가 되었을 때 대표는 우리에게 진정한 쉼을 위해 한국인들이 없는 곳에서 안식월을 가지도록 주문했다. 쉼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하여 왜, 어떻게 쉬어야 할지 몰랐던 우리에게 꼭 필요한 지혜로운 권면이었다. 과거 쉼의 의미를 막연히 휴가 정도로 생각하고 어정쩡하게 보내던 우리였지만 이제는 생각을 바꿔 기도편지를 통해 동역자들에게 제대로 된 안식월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적당한 장소의 소개를 요청했다. 마침 한 지인이 자신의 산장을 빌려주겠다고 해서 우리는 거기서 2주간 쉼을 갖게 되었다. 주변에 마을이나 인가도 없고 전화나 인터넷이 차단된 깊은 산속에서 2주간 보내는 게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며칠이 지나면서 새로운 리듬에 적응되기 시작했고 일주일쯤 지나자 진정한 쉼과 경신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우리부부는 매일 오전 David Bosch의 '길 위의 영성'을 한 장씩 읽은 후 깨달음과 도전과 반추와 적용의 대화를 진지하게 나눴고, 매일 오후는 산책과 등산을 하며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보냈다. 결혼기간이 얼추 40년이 된 우리였지만 그 2주간만큼 깊이있는 대화와 의미있는 나눔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는 깨달음이 있었고, 시간에 쫒기지 않는 충분한 나눔이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하며 그간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회복의 과정을 가능케 해주었다. 바쁜 일상의 사역을 멈추고 의도적으로 가진 쉼의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안 쉼 혹은 안식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단계를 넘어 구체적으로 시행하는 결단이 필요하므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해본다. 먼저 Kessler의 글에 나오는 몇 가지 제안을 인용한다. 1. 쉬는 날을 구별하라 (Keep the day different). 안식일은 일하는 6일과 다른 명령을 주셨음을 인지하고 이 명령을 순종하기 위한 의도적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안식을 얻기 어렵다. 2. '영적인 일'조차 쉬어라 (Rest even from spiritual work). 특히 목회자나 사역자를 위한 제안인데, 이는 영적 사역자들의 소진을 막기 위한 첫 단계다. 3. 모든 일이 다 끝난 것처럼 안식하라 (Rest on the Sabbath as if all your works were done). 우리의 일이 기계적으로 한 주 안에 끝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일에 매달려 있지 말고 다 끝난 것처럼 여기고 안식하라는 것이다. 안식일의 어근인 Shabot은 '멈추라'(cease)는 의미임을 명심하라. 4. 그저 시간을 소진하지 말고 쉼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라 (Having time instead of dissipating time). 문명사회일수록 휴가(vacation)가 쉼을 대신하는 경향이 있고, 그 시장이 점점 커지면서 그 기간에도 많은 활동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부추기고 있다. 현대인의 '분주한 휴가'와 달리 안식은 의도적으로 멈추는 것임을 명심하라. 필자의 제안을 덧붙여본다. 1. 사역은 청지기적으로 책임있게 감당하되 그에 상응하는 정기적 쉼을 갖도록 격려하고 이를 점검하는 공동체 문화의 형성이 필요하다. 2. 책무의 범주에 책임있는 사역과 함께 균형있는 쉼을 포함해야 한다. 서두에서 던진 책무와 쉼의 상관관계에 대한 답이 여기 있다고 본다. 쉼을 오해하면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도 있지만, 건강한 쉼은 건강한 사역만큼 중요하다. 개인적 경험을 뒤돌아볼 때 어떤 기준과 근거에 의해 어떤 쉼을 어떻게 갖느냐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선교뿐 아니라 더 넓은 의미에서, 모든 성도는 건강하고 균형잡힌 안식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된 기쁨을 올바로 누릴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나가며 Eugene Peterson은 위에 인용한 짧은 글('Busyness')에서 만일 현대 크리스찬들이 진정한 안식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실천하려는 의도적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계속 분주한 사역자들로 남아있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청종하던 마리아보다 여러 가지 분주한 일로 자신과 주변사람을 힘들게 하던 마르다로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이라 경고한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시라 하시도다(시 46:10)." 우리는 가만히 있지도 않을 뿐더러 하나님이 높임을 받으시기 전에 바쁘게 일하느라 하나님보다 우리 자신이 높임을 받게 될 때가 너무나 많은 것 같다. 마라톤 선수인 이봉주가 마라톤 경주를 앞둔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잘 준비했어도 막판 커디션 관리에 실패하면 완주가 어렵다"고 했는데 그만큼 휴식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휴식이 없이는 완주도 없다. 일(doing)에 과도하게 매달리기보다 바른 존재(being)의 삶을 살아내는 방법은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쉼'을 갖는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