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현장 사역 이후 단계에서 선교사의 정신 건강: 디브리핑 이재진, WGA/GBT 들어가며 금년 방콕포럼의 주제인 ‘선교사의 정신 건강’의 한 분야로 디브리핑에 대한 발제를 부탁을 받은 뒤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을 읽으면서 그동안 내 자신과 가정이 지내온 여정을 잠시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먼저 본인이 이런 글을 쓸 자격이 있는지 고민이 되었는데 디브리퍼로서 경험이 미미할 뿐 아니라 본인 스스로 변변한 디브리핑을 받아 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오래 전부터 관심이 많아서 기회 있을 때마다 관련 세미나와 책을 통해 선교사의 정신 건강이 선교에 미치는 영향력을 절감해 왔고 디브리핑이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디브리핑에 대한 전문적 논술이라기보다 그동안 읽었던 글들을 토대로 본인의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디브리핑이란? 경찰학 사전에 나오는 디브리핑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공작 임무를 마치고 귀환한 공작원이 공작관에게 공작상황을 보고하는 과정을 말하며, 공작지에 파견되었던 공작원이 귀환하는 즉시 시작한다.’ 선교사의 디브리핑을 정의하기 위해 ‘공작’(공작원, 공작관, 공작상황, 공작지) 대신 ‘선교’란 단어로 바꿀수 있겠지만 선교사의 디브리핑은 단순한 보고 이전에 하나님의 섭리적 주권 안에서 모든 과정을 들여다보는 일이 포함해야 할 것이다. 선교지에서 귀국한 선교사는 일반적으로 디브리핑을 통해 지난 사역을 보고하는데 디브리퍼들은 보고를 통해 선교사들이 했거나 겪었던 일만으로 평가하기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일에 참여하게 하신 은혜를 깨닫도록 도와야 한다. 또한 그 분 안에서 통합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인식하고 새로운 힘을 얻어 차기 사역을 준비하도록 도와야 한다. 많은 선교사들이 처음 사역지로 파송될 때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갖고 나가기 마련이다. 두려움이 전혀 없지는 않았겠지만 양질의 선교훈련으로 정신적, 사역적 준비가 되고 자기를 신뢰하는 선교단체, 파송 및 후원 교회, 동역자들의 사랑과 기도는 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맡겨진 사역을 넉넉히 감당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상승시킨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사건 사고와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경험하면서 선교사의 마음 문은 서서히 닫히게 된다. 이것은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삶 속에서 드러나는데 때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분노, 슬픔, 자기비하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는 문제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안식년으로 귀국하는 경우도 있다. 폴라 오키프는 자신이 겪은 경험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있고, 그 경험을 들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디브리핑의 힘이라고 했는데 이 힘이 정서적, 육체적, 영적으로 소진된 선교사를 회복시킨다. 로널드 코레스키는 디브리핑의 힘에 대해 “삶과 사역의 한 장(chapter)을 건강하게 마무리하게 해준다. 그 장을 지나면서 그간 누적되었던 감정적으로 힘든 부분을 세 가지로 정리해준다”고 말했다. 1) 언어화(verbalize):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말로 표현한다. 2) 정상화(normalize): 개인이나 집단에게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말하고,이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생각이 정상임을 깨닫는다. 3) 상황화(contextualize): 좋은 디브리핑은 우리의 경험을 삶의 현장으로 이끌어준다. 이전의 경험들을 삶 속에 적용하며 하나님께서 미래의 삶에서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실지 기대한다. 행정인력이 부족한 선교단체의 국내 본부 입장에서 표면상 건강한 선교사들보다 그렇지 못한 이들의 디브리핑을 우선시하다 보면 디브리핑의 기회를 놓치고 선교지로 귀환하는 선교사들이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모든 선교사는 반드시 디브리핑을 통해 차기 사역을 건강하게 준비해야 한다. 디브리핑의 종류 데비 로벨호커는 디브리핑을 크게 세 종류로 나눈다. 1) 사역적(조직적) 디브리핑: 주로 선교단체(조직)에서 시행하는 것으로 단체는 디브리핑을 통해 선교사의 사역을 보고 받고 이에 대한 평가와 함께 사역 방향을 서로 논의함으로써 선교사들이 단체의 보호를 받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2) 개인적 디브리핑: 선교지에서 개인적 경험과 그 경험이 삶과 사역에 미친 영향을 나눔으로써 그 경험에 대한 통합적 이해를 얻게 되어 미래사역에 도움이 된다. 3) 사고, 위기(Critical Incident) 디브리핑: 자연재해, 폭력사건, 끔찍한 사고 등 트라우마 상황 이후의 전략적 디브리핑으로 피해자의 빠른 회복을 돕고 재난후유장애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위기 디브리핑에 대해 직접적 경험이 없는 입장에서 특별히 언급할 것이 없지만 미국 남침례교 선교부(IMB) 사역자로 25년간 위험지역에서 일했던 레이몬드 힉스가 위험지역에서 일한 사역자들은 특별한 사고가 없었더라도 위기상황을 경험한 사역자들과 유사한 디브리핑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최근 한국 선교연구원(KRIM)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한국 선교사들이 많이 일하고 있는 30개 국가 중 13개국이 해당 정부가 선교를 제한하는 창의적 접근 국가이며 이 지역에서 사역하는 한국 선교사들이 전체 선교사들의 46.9%라고 한다. 물론 창의적 접근 지역이 반드시 위험지역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레이몬드 힉스의 생각대로 이들을 위한 특별 디브리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집단 디브리핑의 중요성을 개인적 경험을 통해 나눠본다. 우리 가정은 1986년 세 아이들과 함께 P국과 I국에서 5년간 사역한 후 비자 연장의 문턱에 걸려 국내 사역에 합류했고 2002년부터 현재까지 국제 본부에서 일하고 있다. 1990년대 초반 현지 선교부와 I국 문교성의 장기계약이 만료된 후 재계약이 무산되면서 우리 가정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홀연히 현지를 떠나야 했는데 모두들 마치 실향민 같은 심리적 타격을 입었다. 현지 선교부는 재원을 확보하여 100여 명이나 되는 사역자 가정들을 제3국에 초청해서 집단 디브리핑을 했고 사역자들은 정리되지 않았던 슬픔과 분노를 눈물, 상호간 위로, 공식적인 이별 등의 과정을 통해 해소하고 치유받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 디브리핑과 상담 유희주 선교사는 사역을 마치고 돌아온 선교사가 디브리핑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자신의 이야기로 재구성함으로써 혼자가 아닌 하나님 안에서 사역이 진행되었음을 깨닫도록 돕는 일이 심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디브리퍼가 상담에 대한 기본적 지식과 기술을 갖추는 일이 필요한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비밀유지(confidentiality)와 경청이 아닐까 싶다. 특히 비밀유지는 우리문화에서 좀 더 신중히 다뤄야 할 문제인 듯하다. 많은 사역자들에게 상담과 디브리핑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기 때문이다. 본인이 만난 한 여선교사는 안식년에 귀국해서 개인 디브리핑을 간절히 원했지만 본부에서 정해준 디브리퍼가 과거 다른 선교사를 디브리핑 했던 사례를 여과 없이 말하는 모습에 마음 문을 닫았다고 고백했다. 물론 디브리퍼는 익명으로 이야기했지만 여선교사는 그 사람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은 몇 사람만 연결하면 다 통할 정도로 좁은 사회이므로 서양보다 이 문제를 더욱 신중하게 다뤄야 할 것이다. 디브리퍼의 경청은 디브리핑 대상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 생각한다. 사역자의 분노, 아픔, 애환을 아무런 편견 없이 들어주는 것은 사랑없이 어려운 일이다. 때로는 사역자의 생각이나 주장을 반박하고 싶기도 하고 논리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옳지 않은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디브리퍼가 할 수 있는 일, 아니 해야 할 일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전문 상담가에서 그 문제를 넘기는 것이다. 미래지향적 제안 이 글을 준비하며 이런저런 자료를 확인하다가 2008년과 2009년 두 차례에 걸쳐 국내 디브리핑 세미나에서 받은 파일을 발견했다. 물론 그 이후로도 한국 선교계는 디브리핑에 대해 더 많은 연구와 변화를 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아직도 대책 없이 아파하는 선교사들이 너무 많다. 자신이 사역적으로 옳은 길을 걷고 있는지, 다른 한국 및 외국 선교사들과의 관계는 왜 그토록 힘들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자녀교육은 제대로 하고 있는지, 부부관계는 정상인지 등 수많은 질문들이 쏟아지고 있다. 선교사 정신 건강의 바람직한 미래를 위해 아래와 같이 제안을 하며 여기에는 디브리핑을 포함한 멤버 케어 측면도 포함됐다. 1. 한국 선교의 토양에 맞는 디브리핑 자료 및 방법의 개발 빌 테일러는 문화를 뛰어넘는 (타문화) 상담의 민감성(혹은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멤버 케어 네트워크 및 다양한 문화에 적합한 멤버 케어 사역의 필요를 강조했다. 이러한 필요에 대한 다양한 노력이 있으리라 믿는데 유희주 선교사가 한국적 디브리핑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디브리핑 워크숍을 실험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 한 사례라 할 것이다. 2. 디브리퍼 인적자원의 발굴과 훈련 폭넓고 다양한 디브리퍼들이 발굴되고 이들을 위한 훈련도 필요하다. 현재 활동하는 디브리퍼들이 대부분 여성들인데 디브리핑이 필요한 대상이 여성뿐 아니라 남성임을 감안할 때 남성 디브리퍼의 확보가 시급하고 독신 사역자와 선교자 자녀를 위한 디브리퍼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선교자 자녀의 경우 디브리퍼의 역할에 따라 그들이 선교지의 삶을 긍정적 또는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되어 장차 성인 선교자 자녀로서의 정신적 건강을 좌우할 변수가 될 수 있다. 또한 한국 선교운동의 한 세대가 지난 현 시점에서 사역을 마무리하고 귀국하는 은퇴 선교사들에 대한 디브리핑의 필요도 절실하다. 덧붙이고 싶은 것은 디브리핑을 자칫 선교지에서 국내로 돌아온 선교사들을 위한 것으로 제한하기 쉬운데 국내 사역자들에 대한 정기적 디브리핑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는다. 3. 지역교회의 적극적 참여 선교사의 파송은 지역교회를 통해 이뤄진다. 현지 선교사들에게 따스한 위로의 메일이나 정성이 담긴 선물을 보내주는 주체도 대부분 지역교회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사역에 대해서는 대부분 선교단체와 논의하고 지역교회에게는 보고용 선교편지를 쓰는 것으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지역교회도 선교사의 생일이나 절기를 맞아 카드나 선물을 보내고 귀국한 선교사에게 숙소를 마련해 주는 것으로 (그것만 해도 너무 감사한 일이지만) 선교사에 대한 돌봄의 역할을 제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지역교회가 선교사들의 어려움과 고민, 아픔 등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짊어지려고 노력하는 자세는 선교에 대한 깊은 이해와 폭넓은 동역을 가능케 하는 열쇠라고 믿는다. 지역교회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디브리핑에 참여할 수 있을지는 더 고민하며 해법을 찾아야 하겠지만 지역교회, 선교사, 선교단체가 유기적으로 동역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 시너지를 창출하는 파트너십의 첫 걸음이 아닐까 생각된다. 나가며 선교사의 양적 증가가 곧 선교의 질적 성숙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 교회는 더 많은 선교사를 내보내고 더 큰 일을 시도하기보다 얼마나 성경적으로 바르고 건강한 선교를 하고 있는지 물어야 할 시점이 왔는데 선교사의 정신 건강이 그 중요한 척도라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일정기간의 사역을 마친 선교사가 그동안의 삶과 사역을 되돌아보고 반추할 기회를 제공하는 디브리핑의 확산은 건강한 한국 선교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요건인 셈이다. 유희주 선교사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 선교사들은 디브리핑이 자신의 사역을 점검하고 그 의미를 찾으며 자신과 사역에 대한 공감과 지지를 체감하도록 돕는 매우 긍정적 기능으로 생각한다. 디브리핑을 통해 얻게 되는 이 긍정적 반응이 선교지의 긍정적 열매로 결실하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