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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설악포럼 2020-4: 발제 By 손창남 프린트   
송주명  Email [2020-11-13 08:54:24]  HIT : 952  
첨부파일 : (2161_1)손창남 발제 - 한국 OMF 40년을 돌아보며.hwp

 

한국선교 40년 역사를 통해 본 전통적 선교의 회고와 전망

 

손창남 (OMF)

 

들어가면서

  한국 선교는 1980년부터 시작된 한국 선교의 부흥기라고 불릴 수 있는 40년을 평가할 만큼 성숙해졌다. 이제 한국 교회는 진정한 의미의 성숙한 존재로서 지난 40년의 선교를 돌아보고, 그 성찰의 결과를 토대로 앞으로 나가야 할 새로운 좌표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 서구 선교의 변화
  18세기 말로부터 지난 200년 넘게 지속되어 온 개신교 선교는 1945년 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이어지는 2,3 세계의 독립으로 인해 약화되어 왔다. 국제적인 기독교에 대한 저항, 더 나아가 서구 교회가 해왔던 선교에 대한 반성이 제기되었다. 물론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떤 곳에서는 현지 교회들의 자립을 위해 선교사들이 출구를 결정한 곳들도 생겨났으며, 새로운 전방개척지역들에서는 선교사들이 새로운 전력으로 새롭게 들어가기도 했다. 어떤 면에서 서구 교회가 해왔던 전통적 선교는 한국 교회가 본격적으로 선교에 뛰어들기 전부터 이미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지난 40년 동안 세상은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었다.
  이런 변화에 발맞추어 서구 선교는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 서구의 선교가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서구의 선교는 아직도 새롭고 실험적인 시도들을 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시도들은 선교사 비자를 받지 않는 공산권이나 이슬람 지역에서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선교 사역을 진행하는 것이다. 새로운 시도들이 성공적인 열매를 가져온 경우도 있지만 18세기와 19세기 중반까지 이룬 열매에 비하면 매우 적은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지난 40년의 한국 선교역사를 돌아보면서 선교단체를 통해 선교사를 파송하는 전통적인 선교의 모델에서 서구 교회들이 발을 빼는 시간에 한국 교회들은 새롭게 발을 들여놓은 모양이라는 평가도 많다. 심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서구 교회가 해오던 선교라는 사양 산업을 한국 교회가 떠맡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후발주자인 한국 선교가 서구 선교가 하려는 새로운 선교적 실험에 잘 동참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 뉴노멀
  더욱이 2020년이 시작되면서 퍼지기 시작한 코로나 바이러스 19는 선교에 있어서도 이전과는 다른 상황을 만들었다. 전통적으로 선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육신을 입고 오신 성육신 원리에 기초해서 진행된다고 믿고 있었다. 이제 코로나 바이러스 19로 인해 언택 (untact)이라는 뉴노멀 (new normal)이 일상에 자리 잡으면서 교회들은 이전에 해오던 선교사역을 대폭 수정해야만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19가 가져온 변화는 교회재정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수많은 교회들이 성도의 수가 감소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고, 그에 상응하는 재정의 감소 또한 명약관화해 보인다.
  거의 모든 선교지에서 정부는 노골적으로 정부의 감시와 통제를 더 강화할 것이며 선교활동은 더욱 위축될 것이다. 분명한 이유가 없는 외부인이 선교지에 존재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한 때 한국 교회 선교의 대명사처럼 여겨져 왔던 단기선교여행이 아마도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
● 한국 OMF에 대한 평가
  최찬영 선교사가 태국으로 파송된 1950년대부터 친다면 길게는 70년, 그 후 한국 교회가 선교사들을 대량으로 파송하기 시작하는 1980년대부터 친다면 짧게는 40년의 한국 선교를 진단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예측한다는 것은 너무 거창한 작업이다. 발제자는 40년 한국 선교의 샘플로 발제자가 속해 있는 한국 OMF를 진단하려고 한다. 한국 OMF가 한국 선교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한국 OMF가 지나온 궤적 속에는 한국 선교의 문제점들이 많이 녹아 있음을 발견했다.
  발제자가 한국 OMF를 한국 선교를 진단하는 하나의 샘플로 삼은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1. 한국 OMF가 가장 초창기 선교단체라는 점
2. 전체 회원규모가 60명가량이라 분석하기에 비교적 용이하다는 점
3. 한국 선교가 경험할 수 있었던 많은 내용들을 담고 있다는 점

 

  발제자가 한국 OMF 40년을 돌아보고 진솔하게 이야기 하는 것은 한 단체를 생체실험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한국 OMF의 40년 사역 안에 나타난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성찰의 내용이 어떤 면에서는 서구교회가 시작한 전통적인 선교의 많은 문제점을 그대로 노정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디 이번 방콕과 설악의 연석포럼에서 한국 OMF 40년의 역사에 대한 성찰이 한국 선교를 돌아보는 일종의 마중물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

 


  위 도표는 1980년부터 2020년 사이에 허입된 한국 OMF 선교사와 탈퇴한 선교사 그리고 중간에 현역 선교사의 수를 나타낸 것이다.
 

1. 1980-1990: Forming Stage

(1) 한국 전체의 분위기
  이 시기 한국은 경제 성장의 큰 도약을 경험하고 있었다. 연이은 경제성장 개발 계획의 성공으로 수출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특별히 1988에 개최된 서울 88 올림픽으로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 국력을 과시했다. 자신감을 얻은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부터 해외여행 자유화를 허락했고 한국 국민들은 너도나도 여권을 소지하고 외국을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에 대한민국에서 이루어낸 것 가운데 하나는 독재의 종식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이어진 군부 중심의 군사독재가 막을 내리고 민간 주도의 정치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는 한국 교회들의 부흥의 시대였고, 동네마다 교회들이 개척하여 교회가 없는 동네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교회들은 선교에 눈뜨기 시작했다. 동시에 캠퍼스 사역들도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런 결과로 1988년 청년 대학생들을 위한 선교동원 대회가 선교한국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첫 모임에는 500명이 채 되지 않는 참가자들이 모였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참가자는 늘어났다.

 

(2) 국제 정세
  1980년대는 베트남 전쟁이 종식되고, 원수 관계였던 베트남이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으며, 중국의 등소평이 개혁개방을 표방하며 미국을 방문하는 등 새로운 세계질서의 시대를 열었다. 특히 1989년 구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뒤 이은 동유럽의 자유화, 그리고 독일의 통일이 이루어지면서 냉전의 시대를 마감했다. 그것은 새로운 선교지의 개방을 의미하기도 했다. 특히 중국의 개방이 온 세계를 놀라게 했는데, 등소평의 실용주의는 중국의 문을 경제적인 기회를 위해 활짝 열었다. 전 세계의 기업이 앞 다투어 중국에 투자를 시작했다.

 

(3) 한국 OMF

● 선교지에서 사역하는 멤버 현황
한국 멤버 숫자는 한 가정을 한 unit으로 했을 때 1980년 처음으로 일본으로 변재창 선교사 가정을 시작으로 1 unit에서 11 unit으로 증가했다. 이를 조금 더 자세히 보면 다음과 같다. 11 unit 가운데 목사가 아닌 가정은 한 가정뿐이었다.

 선교지

unit 

사역지의 개방성 

 일본

 5

 완전 개방

 홍콩

 1

 완전 개방

 대만

 2

 완전 개방

 인도네시아

 3

 준 개방

 합계

 11 unit

 

 

 

 

 

  위의 표에서 보는 것처럼 1980년대 한국 OMF 선교사들은 모두 완전 개방 지역이나 준 개방 지역에서 사역했다. 이런 상황은 대부분 목회자 중심의 교회사역이나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었고, 특히 문화적으로 가깝다는 이점은 서양 선교사들이 어려워하는 개척사역들을 통해 많은 사역의 열매를 가져왔다. 이것은 이제 선교에 막 눈뜨기 시작한 한국 교회에 OMF의 좋은 인상을 주었다.
● 엄격한 스크리닝 (screening)
  1980년부터 1990년까지 10년 동안 11 가정이 파송된 데는 엄격한 스크리닝 과정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스크리닝을 담당한 이사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하루 종일 부부와 자녀들을 모두 인터뷰 하는 등, 선교사로서의 자격을 엄격히 확인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대표가 없던 시절 이사장으로 대표의 역할을 대신했던 김인수 장로는 스크리닝에 대해서 매우 엄격했다. 그래서 일 년에 한 unit밖에 필드로 갈 수 없었다.
● 한국 선교의 선두 주자
  다른 선교단체가 없던 시절 한국 OMF는 동아시아 캠프, 동아시아 기도회, 동아시아 기도지를 통해서 지역교회를 선교적으로 깨우고 도왔다. 이런 것들은 선교의 경험이 거의 없었던 한국 교회 혹은 한국에서 시작한 자생 선교단체들에게 좋은 모델이 되었다.
한국 OMF는 아직 선교사 파송기관이 많지 않았던 시대에 한국 선교의 선발 주자로서의 이점을 톡톡히 누렸다. 한국 OMF가 하는 여러 가지 동원의 방법들은 무척 신선한 것으로 다른 교회나 선교단체들이 벤치마킹하는 일종의 모델이 되었다.
  -동아시아 캠프: 선교 관심자들을 모아 캠프를 열어 선교에 관한 강의를 집중적으로 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 훈련 학교: 매주 선교 훈련을 실시했다.
  -동아시아 기도지: 계간지로 발간되는 잡지에는 동아시아의 현황, 선교사들의 사역보고, 기도제목들이 실렸는데 한국 교회들에게 초창기 선교 전문 잡지로 각광을 받았다.
이런 모든 컨텐츠들을 한국 OMF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아니라 120년의 역사를 가진 국제 OMF의 컨텐츠를 가져올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 선교지에서의 열매
  처음 파송된 한국 선교사들은 주로 OAN 지역에서 교회개척 사역을 했는데, 두 가지 면에서 큰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문화적 유사성이다. 랄프 윈터 박사가 말한 문화적 거리로 말한다면 대부분의 동아시아의 문화와 한국 문화의 거리는 E2 혹은 E 2.5정도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한국 교회에서 선교사들은 사역의 경험과 노하우를 지니고 선교지로 갈 수 있었다. 당시 선교사로 파송된 11 가정의 평균 나이는 30대 중반인데, 이것은 서구에서 오는 선교사들의 평균 나이에 비해서 열 살이나 위인 것이다. 이들이 이루어낸 사역의 성과는 대단했고, 한국 OMF가 발간하는 동아시아 기도지에 이들의 사역 내용이 많이 게재됨으로서 한국 교회에 선교의 귀감으로 보였다.
● 외국 선교사와의 이질감
  하지만 동시에 같은 조직 안에서 E3 혹은 E 3,5의 문화적 거리를 가지고 있는 동료들과는 문화적 차이로 인해 갈등도 많았고, 사역의 경험이 적고 훨씬 젊은 서양의 리더십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은 한국 선교사들은 더욱 필드에서의 사역에만 몰두하게 되고, 한국 교회와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지는 반면 선교지에서 서양 동료들, 그리고 서양 리더와는 더 멀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 선교한국에서의 활약
  1988년 학생 단체인 JOY 선교회와 GMF 공동 주관한 선교한국 88 대회에서 주강사는 다름 아닌 중국내지 선교회의 창시지인 허드슨 테일러의 증손자 Dr. Taylor였으며, 선교한국 88대회의 상당히 많은 강사들이 한국 OMF 선교사들이었다.
● 알자 세미나
  한국 OMF는 필드의 선교적 필요를 알리기 위해 국제 OMF에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초청해 알자 선교지의 필요를 알리는 ‘세미나 (awareness seminar)’를 개최했다. 일본과 인도네시아는 물론 이제 막 개방이 시작된 중국을 알자 세미나를 개최해서 큰 호응을 받았다.


II. 1991-2000: Storming Stage

(1) 한국 전체 분위기
● 민주화와 경제화
  한국의 민주화도 진행되어, 군사독재가 끝나고 민간 주도의 정치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1993년에는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처음으로 군인 출신이 아닌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우리나라는 1995년 역사적인 국민소득 1만 불을 달성했다. 7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잘 마무리 되면 집집마다 자가용을 가질 수 있는 마이카 시대가 허황된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 집집마다 퍼스널 컴퓨터를 가질 수 있었고, 이로 말미암아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었으며, 의사소통이 빨라졌다.
● 시장 개방의 허와 실
  자신감을 얻은 한국 정부는 자본시장을 개방하는 등 세계 경제의 일익을 담당하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방만한 기업 경영과 권력과 결탁한 재벌의 문제가 도화선이 되어 1997년 외환위기를 겪게 되었고, 이로 인해 IMF의 요구에 따라 한국경제는 구조조정을 당하는 아픔도 경험했다. 중산층이 몰락하고 선교후원에도 타격을 주었다.
● 대형교회 운동
  1990년대에 교회들은 계속 성장했는데, 수적인 성장에 집중하면서 대형교회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너도나도 교회성장을 위해 매진했다. 미국의 윌로크릭 교회나 새들백 교회를 벤치마킹하려는 목사님들이 줄을 지어 방문하는 진풍경을 낳기도 했다.
● 선교동원의 부흥기
  선교동원이라는 측면에서 1990년대는 황금기를 구가했다고 말 할 수 있다. 선교한국 대회에는 수 천 명이 참석하였는데, 1996년에는 6,000 명이 참가하는 등, 선교 동원의 절정을 이루었다. 국내에 많은 선교단체들이 자생적으로 생겨났으며 Inter-Serve, WEC, 등의 다른 외국 선교단체들도 이 시기에 한국에서의 사역을 시작했다. 무엇보다 교단 선교부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 원칙 없는 선교의 확장
  하지만 한국 교회의 선교의 단점들도 노출되기 시작했다. 원칙 없는 선교의 붐은 선교사를 보내는 것이 선교의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선교사들이 해마다 수 백 명씩 파송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한국 교회에 ‘미전도 종족 입양’, ‘최전방교회개척’ 등의 도전적 전략이 소개되었고, 해외에서도 새로운 선교지가 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볼 때 이런 전략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한국 교회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 새로운 선교지의 확장
  중국이 개방되면서 많은 선교사들이 가기 시작했고, 공산권으로, 무슬림 권으로 그리고 동아시아에서도 메콩 강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미전도 종족 사역이 진행되었고,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등으로 가기 시작했다. 무슬림 사역에 대해서도 한국 교회가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했다.
● 단기 선교여행 붐
  이 당시는 단기선교여행의 전성시대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많은 교회들이 단기 팀들을 해외로 보냈다. 여름 방학의 경우 어떤 선교지로 가는 비행기에는 한국 단기 선교 여행 팀이 전체 승객의 반을 넘었다고도 한다. 단기선교여행은 일반 성도들이 선교지를 경험한다든지, 그곳에서 사역하는 선교사의 사역을 단기간 집중적으로 돕는 등의 좋은 면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단기 선교 여행을 선교로 착각하는 문제도 야기 시켰다.

(2) 국제 정세
● 냉전 시대의 종식
  이 시기에는 냉전 시대가 종식 되고 바야흐로 미국의 독주 시대가 시작되었다. 미국은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며 도처에서 전쟁에 참여했는데, 대표적인 것은 1991년에 있었던 1차 걸프전이었다. 이로서 미국은 이슬람과의 대립을 드러내었으며, 계속 되는 이슬람 무장 세력의 표적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 일본 경제 후퇴의 시작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일본은 1960년대부터 세계시장으로 진출해서 1970년대에는 전 세계의 자동차와 전자제품 판매에 있어 대단한 능력을 드러내보였다. 하지만 미국은 무역적자의 주범으로 일본을 지목하고 엔화의 인상을 강요하게 되어 수출에서 내수로 경제를 전환하게 된다. 일본이 세계경제에서 엔고로 어려움을 당하는 동안 한국은 반사이익으로 늘어난 수출을 통해 경제 성장을 경험하게 된다.
● 중국의 성장
  중국은 새로운 세계 경제 질서로 도약하기 위해서 한국과의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했다. 중국에서 한국 사람들을 환영을 받았다. 선교를 위해서도 좋은 기회로 생각되어 많은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갔다. OMF도 예외가 아니었다.
●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의 개방
  1980년대까지 소비에트 유니언의 일원으로 있던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이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면서 새롭게 개방되어 한국 정부와 경제협력 등의 관계가 새로워졌다.

(3) 한국 OMF
● 선교지에서 사역하는 멤버 현황
  이 기간 동안 한국 OMF 가 파송한 선교사 가정은 11 unit에서 40 unit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중간에 8 unit이 사임을 하면서 2000년 말까지 현역 선교사 가정은 32 unit이 되었다. 이 가운데 전문인 선교사의 수는 4명이었다. 따라서 전체 선교사 가정 수와 비교하면 10%, 현역 선교사의 수로 비교하면 12.5%에 해당한다.
  한국 OMF 선교사들이 사역하는 필드의 숫자도 늘어나고 파송 선교사의 숫자도 현저히 증가했다. 하지만 다수의 신임 선발 과정에서 스크리닝이 문제가 되는 경우들이 있었다.

 

 선교지

가정수

개방 정도 

 비고

2000년 말 현역 

 일본

 9 unit

 open

 사임 3 unit

6 unit 

 대만

 5 unit

 open

 사임 1 unit

 4 unit

 홍콩

 1 unit

 open

 사임 1 unit

 0

 인도네시아

 4 unit

 semi open

 사임 2 unit

 2 unit

 태국

 7 unit

 open

 사임 1 unit

 6 unit

 필리핀

 1 unit

 open

 

 1 unit

 말레이시아

 0 unit

 

 

 

 캄보디아

 4 unit

 open

 

 4 unit

 중국

 7 unit

 CAN

 

 7 unit

 본국 사역

 2 unit

 open

 

 2 unit

 합계

 40 unit

 

 사임 8 unit

 32 unit

 

 


● CAN을 포함한 필드의 다양화
  한국 선교사들은 이 시기에 일본, 대만, 인도네시아, 홍콩을 넘어 다양한 선교 필드로 선교사들이 가기 시작했다. 특별히 많은 선교사들이 중국본토로 갔고, 대만에 있던 선교사들이 대거 중국으로 가게 되면서 개방지역을 중심으로 하던 한국 OMF 멤버들의 사역은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한국 OMF 멤버들이 중국이나 무슬림 지역과 같이 창의적 접근 지역에서 사역을 하면서 1980년대에 열린 지역에서 사역하던 것과 비교할 때 선교지의 다이나믹한 소식을 공개적으로 전하기 어려워졌다. 선교사들은 사역명이라고 하는 가명을 사용하였고, 자기들의 사역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해서 동아시아 기도지를 통해 한국 교회에 OMF의 소식을 알기는 것이 어려워졌다.
  창의적 접근 지역으로 가는 선교사들이 늘어나면서 전통적으로 OMF의 강점이었던 필드에서 이루어지는 강한 OMF 안에서의 본딩(bonding)이나 책무의 이행 문제(accountability), 목회적 돌봄 (pastoral care) 또한 느슨해지게 되었다.
● OAN 지역의 변화
  캄보디아, 중국, 몽골, 등의 새로운 필드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1980년대에 많은 사역의 열매를 거둔 일본, 홍콩, 인도네시아, 등 전통적인 OAN 지역으로 가는 한국 OMF 멤버들은 감소했다. 이처럼 전통적인 OAN 지역으로 가는 선교사들이 줄은 이유는 여러 가지 이지만 OAN 지역도 점차 CAN화 되어가고 있었고, 무엇보다 이 지역들의 생활비가 올라 높은 선교후원금을 필요로 하는 것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 OAN 지역에서 서양 리더와의 갈등
  어떤 OAN 필드에서는 사역 철학의 차이로 서양 리더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은 교회를 개척한 경우 어떤 기준으로 출구를 할 것인가를 놓고 한국 선교사와 서양 선교사는 견해 차이를 종종 나타냈다. 본국 교회와의 지나친 관계에 대해서도 좋지 않은 평가를 내리기도 했으며 한국에서 파송 된 선교사들의 부정적인 모습이 한국 OMF 선교사들에게 그대로 투사되어 불필요한 오해를 사기도 했다.
● 교단 선교부의 약진
  교단 선교부의 출현은 한국 OMF 선교사들에게 이중 멤버십 (dual membership)을 강하게 요구했고, 이것은 필드에서 OMF에서 하나의 필드 구조 안에서 일하는 전통적인 사역 방식에 큰 문제를 가지고 왔다.


III. 2001-2010: Norming Stage


(1) 한국 국내 상황
● 민주화
  이 시기에 한국은 보수에서 진보로 정권이 교체되기도 하고 2002년 월드컵 개최로 88 올림픽에 이어 다시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세계적인 강팀들을 무찌르고 4강에 올라가는 쾌거를 올렸다.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거리 응원도 세계에 한국을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 경제상황의 변화
  하지만 이 시기 한국의 경제성장은 1990년대처럼 성장하지 못했다. IMF 이후 실업자들이 늘어나고 질이 좋지 않은 고용으로 계약직이 생기면서 소득의 양극화가 심화되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이 3D 업종에서 일하는 것을 꺼려하면서 작은 공장, 농장, 어촌 등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밀려들기 시작했고, 이들을 위해 디아스포라 사역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 기독교와 선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
  이 시기에 지역교회들도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상가마다 있던 개척교회들이 점점 줄어들고 대신 대형교회들이 늘어나는 양극화가 시작되었다. 대형교회들은 한국 교회에 좋은 인상보다는 좋지 않은 인상들을 주어 기독교에 대한 반감도 아울러 생겨났고, 특히 아프가니스탄에서 있었던 단기선교 여행 팀의 사건이 한국 사회에 선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남겼다.
● 선교에 대한 성찰
  선교사의 파송은 늘어났지만 선교지에서 들어오는 좋지 않은 소식들로 선교에 대한 문제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런 문제들을 놓고 성찰과 반성을 하자는 의도에서 많은 포럼들이 생겨났다.
● 선교동원의 변화
  캠퍼스의 학생 사역들이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관심은 새로 사용하기 시작한 스마트 폰과 정규직을 위한 취업 준비에 몰렸다. 선교한국의 영향력도 떨어지기 시작해서 1990년대에 비하면 훨씬 적은 수의 젊은이들이 참석했다. 하지만 PSP (Perspectives Study Program)와 같은 전문 선교 교육은 더욱 증가 추세를 보였으며 선교한국 산하에서 운영되던 선교 교육을 보다 전문성 있게 운영하기 위해서 2010년에는 미션 파트너스가 독립하기도 했다.

 

(2) 국제 상황
● 911 테러
  2001년 9월 알카에다가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 센터를 테러하는 일이 발생했다. 세상은 무슬림들에 대해서 테러 집단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고, 미국은 제 2차 걸프전이라 불리는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단행해서 이슬람 세계와 더욱 적대적인 관계를 만들었다. 이런 상황들은 이슬람 지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의 입지를 더욱 좁히게 되었다.
● 자스민 혁명
  이슬람 세계에서도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소위 자스민 혁명이라고 불리는 자유를 향한 몸부림이 튀니지를 중심으로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하지만 성공적이지 못했고, 그러나 오히려 이슬람 형제단이라는 강성 이슬람들을 부추겨 국가의 독재는 더 강화되고 말았다.
●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는 더욱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미국에서는 부동산 거품이 빠지면서 소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건으로 인해 엄청난 경제적 타격을 주었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투자은행 리만 브라더스가 파산 했고, 집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졸지에 노숙자 (homeless)로 전락하는 일이 발생했다.
● 팬데믹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하나인 사스가 홍콩에서 발발해서 중국 전체와 전 세계에 공포를 안겨주기도 했다.

 

(3) 한국 OMF
● 선교지에서 사역하는 멤버 현황
  한국 OMF의 리더십이 바뀌면서 과거의 잘못된 관행들을 바로 잡는 계기를 만들었다. 가장 크게 확인한 것은 신인 선교사들을 파송할 때 보다 엄격한 스크리닝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 그리고 선교단체의 이름만을 달고 가는 선교사들이 결국은 쉽게 선교단체를 떠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선교단체 안에서 본딩 (bonding)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기간 동안 회원 수는 40 unit에서 25 unit으로 줄었다. 전문인 선교사의 숫자는 4 unit이었다. 

 선교지

가정수

개방 정도

비고 

2010년 말 현역 

 일본

7 unit 

 open

사임 2 unit

본국으로 이동 1 unit 

 4 unit

 대만

 5 unit

 open

 사임 2 unit

중국으로 이동 3 unit

 0 unit

 홍콩

 0 unit

 open

 중국에서 이동 1 unit

 1 unit

 인도네시아

 3 unit

 semi open

 사임 1 unit

 2 unit

 태국

 6 unit

 open

 사임 6 unit

 0 unit

 필리핀

 1 unit

 open

 

 1 unit

 말레이시아

 1 unit

 CAN

 

 1 unit

 캄보디아

 5 unit

 open

 사임 2 unit

 3 unit

 중국

 9 unit

 CAN

 사임 2 unit

대만에서 이동 3 unit

 10 unit

 본국 사역

 3 unit

 open

 

 3 unit

 합계

 40 unit

 

 사임 15 unit

 25 unit

 


  이 시기의 특징은 OAN에서 사역하는 멤버들의 수가 급격히 감소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CAN에서 사역하는 멤버들이 증가는 늘어나서 전체 회원의 50% 정도에 이르렀다. 하지만 전문인 선교사의 동원이 지지부진했다. 여기에는 동아시아에서 전문인 사역의 한계가 있다. 정작 텐트메이커의 수는 40 가정 중 8 가정으로 전체 선교사의 수에 비해 20% 밖에 되지 않았다.

  한국 OMF 내에서 동원의 개념이 바뀌기 시작했다. 단순히 오엠에프 선교사를 발굴하는 것에서 일반 성도들의 선교적 이해와 역량을 키우는 1차 동원에 대한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목적으로 OMF의 책들을 보급하는 패밀리 멤버 사역을 시작했다. 책을 보급하는 것이 1차적 목적이지만 부수적으로 재정적으로도 건강해졌다.


IV. 2011-2020: Performing Stage

 

(1) 한국 국내 상황
● 정치적 변화
  이 시기에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 매우 다이나믹한 시간을 보냈다. 세월호 사건과 대통령 측근의 비리가 알려져 대통령이 탄핵되고 진보 진영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다. 남북 정상 회담이 이루어지는 등 남북 화해의 분위기가 한껏 고조 되었다.
● 경제적 양극화
  이 시기에 경제적으로는 양극화가 더욱 커지고 청년층 실업이 늘어났으며 젊은이들은 취업에 올인 하면서 신앙도 취미도 심지어 결혼도 포기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회는 변했다. 미래를 걱정하는 젊은이들은 정규직이 되는 것이 목표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 교회의 양극화
  이러한 세태는 젊은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대형교회들을 제외하고 일반 지역교회에서 젊은이들의 출석은 점점 줄어드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많은 지역교회들은 5,60 대 이상 혹은 노년들이 다수가 되는 교회들로 변하기 시작했다.
● 기독교 혐오
  지역교회들은 보다 개교회주의가 되기 시작했고 한국 사회 전체에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하고 사람들은 종교와 영적인 것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졌다. 교회에 대한 사회의 반감은 점점 커져서 기독교를 개독교라 부르는 사람들이 생겼고, 통계적으로도 기독교 인구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음을 보이기 시작했다. 주일학교를 운영하지 못하는 지역의 작은 교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선교사 파송의 숫자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 선교의 열기 감소
  전반적인 선교 붐도 꺼져가기 시작했다. 선교한국의 참석자는 계속 줄어 실재 참석자는 3, 4천 명 수준을 겨우 넘었다. 새롭게 선교사가 되려는 사람들의 나이가 높아졌다. 이것은 아마도 후원을 위해서 지역교회와의 본딩에 대한 요구가 늘어났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은퇴를 앞 둔 선교사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은퇴 선교사의 노후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는 큰 숙제로 남게 되었다.

 

(2) 국제 상황
● 동일본 대지진
  2011년 일본은 동일본의 대지진, 그리고 뒤를 이어 나타난 쓰나미로 말미암아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쓰나미는 자연재해로 그친 것이 아니라 후쿠시마 원전을 망가뜨리고 방사능의 노출로 말미암아 2차 피해까지 엄청난 재앙을 노출시켰다. 재해가 많은 것으로 알려진 일본이지만 동시에 재난을 가장 잘 극복하는 나라로 알려진 일본이 전 세계에서 가장 취약한 나라임을 드러내보였다.
● 팬데믹 공포 확산
  2000년대에 사스가 있었다면 2010년대에는 메르스 (MERS)라는 새로운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다시 한 번 공포에 떨게 했다. 그리고 2019년 말에는 다시 Covid 19이라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상을 두렵게 하고 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는 전 세계 정부의 자국민과 외국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시키고, 락다운 (lock-down)이라고 하는 초유의 행정조치로 경제를 거의 마비수준으로 몰고 갔다.
● IS와 난민
  이슬람 국가를 주창한 IS로 인해 시리아 등 많은 이슬람 지역에서 난민이 발생하여 중동 여러 나라와 유럽에 새로운 고민거리가 되게 했다. 미얀마에서는 대부분의 불교신자들의 핍박 속에서 대부분이 무슬림인 로힝야 족 수 백 만 명이 고향을 떠나 난민으로 떠도는 등 전 세계적으로 난민이 새로운 이슈로 떠올랐다.
● G2 갈등
  G2라고 불리는 중국과 미국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특별히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 정부가 들어서면서 중국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기 시작한 갈등은 군사, 외교, 등 전 방위적으로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중국에는 만만치 않은 지도자 시진핑이 들어서면서 국내의 종교 탄압이 강화되었고, 선교사들의 추방도 가속화 되었다.

 

(3) 한국 OMF
● 선교지에서 사역하는 멤버 현황
  이 기간 동안 한국 멤버들은 꾸준히 증가해서 40 unit이 되었고, 10 년 동안 선교지 사정에 따라 이동은 많았지만 사임을 4 unit 밖에 없었다. 현재 한국 OMF는 모두 36 unit이 필드에서 활동하고 있다. 

(나머지 첨부파일참고)

 

     202. 방콕설악포럼 2020-5: 발제 응답 - 권성찬
     200. 방콕설악포럼 2020-3: 발제 응답 - 김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