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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포럼 2014-5: 내부자 운동에 관한 입장 (마자르 말루히) 프린트   
류재중  Email [2016-12-08 17:40:00]  HIT : 729  

내부자 운동에 관한 입장

마자르 말루히

 

나의 영적 저널에 관한 전기에서 나는 스스로 나 자신을 예수를 따르는 무슬림이라고 소개했다. 분명히 이런 표현을 한 사람은 내가 첫 번째 사람도, 유일한 사람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책을 통해 분명한 입장을 표명했으며, 나 자신이 성경번역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고, 선교에 장기간 동참하고 있기 때문에, 내부자 운동을 비난하는 자들에게 표적이 되는 이들 중에 한 사람이 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운동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한 적이 없기에 (하지만 지금 느끼기에 이미 내가 그 일부분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나와 같은 “내부자”는 무슬림 국가나 가족 중에서 주님의 능력으로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받은 후 그들의 문화를 유지하기로 선택한 사람이다. 나는 여기에서 나의 내부자에 관한 설명이 상당히 단순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의 모든 문화적 요소를 버리기로 결정한 내부자들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순히 그리스도에 안에 있는 무슬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묘사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대부분 편안한 의자에 앉아 결정을 하는 사람들(다시 말해 실제로 무슬림 세계에 살지 않으면서 관심 정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무슬림들이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 불필요하고도 부정적인 변화를 겪음으로 인해 그들의 기존의 사회로부터 얼마나 배척을 당하는지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들은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 사는데 있어서 필요한 요소들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문화의 단순히 일부분이다. 잘 알려진 복음주의 속담과 같이 “차고에서 태어났다고 당신을 차로 만들지 않듯이 기독교 가정이나 기독교 국가에서 태어났다고 당신을 기독교인으로 만들지는 않는다”는 말은 무슬림들이 동의하지 않는 말이다. 무슬림 가족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무슬림 공동체의 일원으로 무슬림으로 태어나서 무슬림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힌두나 기독교인이나 유대인이 아닌 무슬림으로 태어났다. 무슬림들은 기독교인들이 세례나 고백을 통해 하는 것처럼 자기의 믿음을 공식적이던지 개인적으로 표현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반대로 공동체로부터 그들 스스로가 떨어져 나가길 원한다면 어떤 분명한 행동을 취해야만 한다. 

 

예수를 따르는 무슬림이 정의하는 바는 그들이 쿠란을 읽던지, 어디에서 기도를 하던지, 그들이 무함마드를 어떻게 생각하던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내부자라는 것은 그들이 태어난 환경이 하나님이 부여하신 환경이며, 그 속에서 그들의 개인적 구원의 스토리를 써가는 자들임을 정의하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를 주로 믿는 것이 자동적으로 그들이 전에 알고 있던 하나님이나 그들의 문화와 공동체와 가족을 악한 것으로 부인하지 않는다. 실제로 나의 공동체로부터 거부를 당하는 몇 가지가 있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서구의 반무슬림적인 정치와 다신교와 우상숭배와 같은 것을 받아 들이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바로 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해하는 바이다. 

 

서구인들은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에 대해 이분법적인 희랍적(Greek) 사고방식을 부여받았다. 반면에 무슬림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무슬림들에게는 모든 삶이 영적이다. 가족관계와 매일의 삶에 관련된 문제, 가족이 함께 먹는 것부터 시작해서 함께 예배하는 것까지 모두를 포함한다. 따라서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문화를 구분하려는 시도는 비무슬림적인 사고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비성경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어떤 특정한 문제에 있어서 무슬림들이 보는 관점은 서구인들의 이분법적인 관점보다 더 성경적 모델에 가깝다. 

 

내부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이던지 하고 싶은 것을 하거나 믿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악을 행하거나 나의 문화 속에 있는 비윤리적인 것을 제어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서구 기독교인이나 후기 기독교 문화 안에서 태어난 내부자와 똑같다. 하지만 많은 무슬림들은 아직도 그들이 언어와 옷차림, 호의를 베푸는 전통과 기도할 때 사용하는 언어 등 이슬람의 모든 자취를 따라 살아야 한다고 배우고 있다. 하지만 서구 기독교인들은 근본적으로 이러한 모든 것이 그들의 문화에서 악한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 

 

이 이슈에 대해 신자들이 무슬림 공동체에 남아 있는 것에 대한 생각에 대해 적대적인 생각을 가진 아랍의 기독교 신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무슬림의 삶의 행동 중에 기독교인이 된 다음 어떤 것을 바꾸어야 하느냐”라고 물었다. 그 학생은 옷 입는 것, 음식, 언어, 결혼, 예배, 금식과 같은 종교 행위 등에 대해 열거를 했다. 많은 토론 후에 결론에 도달했는데 (놀랍게도) 유일하게 두 가지만 복음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메카에 순례를 가는 것과 신앙고백(샤하다) 뿐이었다. 

 

어휘가 토론에서 큰 이슈였다. 토론에서 나에게 주목을 끈 것 중에 하나는 “기독교인 하나님을 알라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 아랍어에서 유일하고 참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알라라는 단어 뿐이다. 알라는 기독교 아랍인들이 하나님에 대해 일반적이며 보편적으로 사용하던 단어였다. 심지어 내부자 운동을 반대하는 복음주의자들조차 하나님에 대해 이 단어를 사용해 왔다. 이것은 하나 뿐이시며 유일한 하나님에 대한 단어이며 히브리어와 같은 셈어 계통이 하나님, 엘, 엘로, 엘로힘과 함께 사용한 단어였다. 이것은 논쟁이 얼마나 빈약한지에 대한 예일 뿐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무슬림 배경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모국어를 저버리고 그들의 자녀들에게 영어로만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이 더 “기독교적”이기 때문이라고 믿는 사람들을 안다. 

 

기독교인이 된 무슬림 배경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서구로 가서 거의 돌아오지 않는다. 무슬림 배경을 가진 신자들이 외국으로 가서 신학을 배우고 나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들이 살던 나라에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이 기독교인 차고가 당신을 기독교인 차로 만든다는 말을 믿게 된 것과 같다. 그들은 기독교 문화로 불리워지는 곳에서 태어나야 기독교인이 되는 것처럼 그들 자녀가 기독교인 되기를 원한다. 

 

무슬림 배경을 가지고 (문화적으로) 기독교인이 된 많은 사람들은 이미 그들의 나라와 문화와 종교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며 믿음을 가진 후 이슬람에 대해 적개심을 갖는다. 나 자신도 나 자신의 문화와 내가 가진 배경에 대해 미워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신학이나 교리 때문이 아니었으며 서구와 서구의 기도교인이 아름답고 나의 것은 추하다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를 따르고 난 이후 무슬림의 문화에 남아 있기를 원하는 자들에 대해 비판을 하는 자들은 다른 대안을 선택하는 것에 대한 가혹함을 잘 알지 못한다. 나는 기독교인들로부터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우리의 문화가 추하다는 얄팍한 메시지를 받아 들인 젊은이들을 보며 마음이 아프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문화 속에는 있지 않다는 느낌을 수용한 것이다. 

 

나와 같은 다른 이들이 내부자가 된 것은 일차적으로 교리 때문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믿음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태도에 관한 것이다. 어떤 기독교 친구들은 나에게 나의 믿음을 고백하거나 신학적 용어로 ‘나 자신에게 대답하라’고 요구한다. “나에게 당신이 정통이란 것을 증명하라”, 혹은 “당신이 복음주의자인 것을 보여라” 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나의 이렇게 외칠 수 밖에 없다. “나에게 당신이 무슬림을 사랑하는 것을 보여라! 나에게 당신의 태도가 주님의 태도와 같다는 것을 보여라! 당신의 행동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뿌리내리고 있고, 그 밖에 다른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나에게 설명해 보라! 당신의 행동이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며, 두 개의 문명이 충돌했을 때 나타나는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봐라!”라고 말이다. 

 

나는 서구의 교회와 많은 시간을 함께 했으며 세계 복음화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에 대한 차별적인 태도를 보이고 나 자신과 나와 같은 다른 이들이 내부자라고 낙인이 찍혀질 때 나는 아픔을 느낀다. 이러한 구별은 믿음이 아니라 태도 때문이다. 

 

나는 무슬림들이 개신교 선교 운동에 의해 불공평하게 취급 받는 것을 보며 당황스러움을 느낀다. 내부자라는 것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슬림 내부자는 불공평하게 소외되어 왔다. 만일 내가 유대인 신자이면서 계속 내가 유대인이라고 말하며 유대인 공동체에 있다면 대부분의 서구 기독교인들에게 칭찬을 받을 것이다. 내 경험상 대부분의 유대인들의 관념 형태는 신약성경 전체를 부정하고 우리의 구주를 적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걸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유대교 안에 남아 있으면서 기독교들로부터 의심이나 편견을 받지 않는다. 미국에서 내 경험은 나 자신이 기존의 전통적인 교회와 기존에 공동체 밖에 있는 (때로는 의심스러운), 미국 오토바이갱이나 기독교 히피와 같은 것으로 취급되는 것이었다. 기존의 그룹들은 의심이나 편견을 전혀 받는 것 같이 않다. 이와 같은 불공평하고 차별적인 편견들을 무슬림 내부자들이 받는 것을 보면서 이것은 선교적 이슈가 아니라 태도에 관한 문제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논쟁이나 이슬람에 대한 비난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서구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점이 여기 있다. 내가 태어난 곳이 바로 이 신앙고백의 집(confessional home)이다. 이슬람은 바로 내 어머니가 나를 감싸고 나를 키웠으며 나에게 노래를 불러 주었고 나를 위해 기도를 해 준 그 이불과 같은 것이다. 나는 내 어머니의 젖을 먹으면서 이슬람의 요소들을 함께 흡수했다. 나는 내 부모님으로부터 이슬람을 물려 받았으며 내가 그리스도를 만날 때까지 나를 키워준 요람이었다. 이슬람은 내 어머니이다. 당신은 당신의 어머니가 추하다고 말하는 사람과 사귀고 싶지 않을 것이다. 당신 친구의 어머니가 아무리 추하다고 할지라도 그에게 “당신 어머니가 못생겼다.”라고 말하지 말라. 그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의 첫번째 반응은 분명히 당신과 싸우려 들 것이다. 나에게 내부자가 된다는 사실은 내 어머니의 젖와 함께 흡수했던 나의 문화와 감정적인 교류를 갖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슬람은 나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내가 무슬림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실행할 필요가 없으며 그것 전체를 믿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내가 그것을 당장 공식적으로 부인한다면 나는 내 가족과 공동체와 나의 사람들로부터 부인을 당할 것이다. 나의 신앙고백의 집에 복음을 전하는 방법은 여러 방법이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변화된 나의 삶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모습을 공동체가 보고 이해할 것이며 나의 영적 여정에 반응하게 될 것이다. 

 

나는 기독교인이 무슬림과 관계를 맺으면서 어떤 이들은 성 보니파세 처럼 이교도의 저항을 뿌리채 뽑아내는 성공을 거두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깨닳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빛과 진리를 전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발로 뭉개 버리는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는 아랍 세계 전체를 여행했으며 “무슬림 배경을 가진 신자들 가운데 다음 세대는 어디에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하곤 한다. 그들은 수는 매우 작다. 하지만 “그들 중 서구의 돈과 연계되지 않은 이들이 있는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신자들이 그들의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될 때 다음 교회는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게 될 것인가?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삶의 상황에서 증인이 되라고 가르치시며 모범을 보이셨다. 나는 비무슬림들을 인정하지 않는 무슬림 단체들로부터 (그것이 꼭 종교적인 단체는 아닐지라도 스스로 무슬림이라고 고백하는 자들로부터) 존경과 인정을 받아 왔다. 

 

나를 무슬림 문화로부터 빼내어가 기독교인이 되게 하는 이들과는 전혀 상대를 하지 않는 무슬림 그룹들로부터 초청을 받고 환대를 받았다. 내가 만약 내부자가 아니라면 이들 그룹과 교제하며 이곳에서 주님을 증거할 수 있었을까?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내부에 거하면서 이슬람 전통과 배치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 뿐이다. 

 

나는 이 이슈와 연관해서 단순화시킬 의도가 없다. 또한 모든 내부자가 모두다 호의를 받으며, 아무도 그들의 가족으로부터 부인을 당하거나 박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님을 따르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증인이 되어 재생산적인 공동체를 낳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믿음을 타협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며, 단지 우리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 필요한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무슬림 상황 안에 거한다는 것이 나쁜 교리를 따라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나는 내부자로 있으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그에게 평강이 있기를)의 신성을 축소시키려는 유혹을 느낀 적이 없다. 나는 삼위일체를 부인하려는 유혹을 느낀 적이 없으며, 쿠란을 성경 위에 높이려는 유혹을 느낀 적 또한 없다. 하지만 내가 사는 무슬림 공동체가 더 탁월하다는 유혹이 없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살던 호주에서 훨씬 더 강한 유혹과 세속적인 물질 문화로부터 오는 부정적인 영향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교리적으로 무오하다고 말할 수 없을지 모른다. 낙원에서 내 주님이 아마도 나에게 내가 저지른 긴 실수들을 보여주실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들이 나의 정신적인 부족함에도 나온 것이지, 나의 인격적인 부족함은 아니며 의도적으로 나의 전통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었음을 말할 수 있다.

 

무슬림 내부자들 또한 우리 모두를 변화시키는 성령에 의해 변화된다. 우리도 모든 기독교인들이 수세기 동안 읽었던 같은 성경을 읽고 있다. 우리가 존중하고 익숙한 하나님의 말씀이 변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교회의 다른 부분이 변하는 방식 그대로 변하는 것 뿐이다. 만일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다시 배워야 하거나, 우리의 모습과 관습을 변화시키고 우리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는 외부의 새로운 형태의 예배를 강요 받지 않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우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그를 떠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떻게 외부인이 우리의 문화와 형태들이 얼마나 우리 가슴 속의 영향을 주는지 알 수 있겠는가? 만일 예수를 따르는 무슬림들이 그들의 종교적 관습이 그들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다른 이들은 그들의 믿음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순진하게 내부자가 이 주제에 대해 논의하는 모든 논쟁의 모든 요소들을 말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특별히 “내부자 지지자”에 관한 이슈에 대해 언급할 내용이 없다. 이러한 것들은 전도방법에 대해 더 상황화된 방법에 대해 지지하는 대부분의 타문화권 사역자들이 언급한 것들이다. 이러한 내용들이 대부분 교리적인 것이고 나의 관심은 태도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내가 언급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믿기는 논쟁은 대부분 교리보다는 태도에 관련된 것들이라고 믿는다. 

 

자기 문화를 가능한 적게 개입시키면서 무슬림들이 주님을 따르도록 하려는 내부자 지지자들의 태도에 대해 나는 감사하고 있다. 그들은 주님의 길을 따르는 무슬림들이 그들의 전통을 떠나도록 압력을 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더 많은 수고를 하고 있다. 더 나아가 많은 교회들이 무슬림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조장하는데 반해, 그들은 기독교와 이슬람, 혹은 서구와 동방의 문명 사이에 충돌을 넘어서려고 하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나는 또한 내부자 운동에 대해 적대적인 자들이 지지자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인해 그들에 대해 동지애를 느끼며, 그들 또한 내가 겪었던 똑같은 편견을 당하는 것을 보아왔다. 예를 들어서 내부자 지지자들의 몇몇 개념들은 정녕숭배자들 가운데 있했던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과 매우 비슷한 것이다. 그러나 내부자 지지자들을 그들 선배들보다 더 많은 의심을 당하고 있다. 나에게 있어 이러한 논쟁은 교리보다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나는 내부자 운동의 지지자들이 정통 신앙을 위헙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한 형태라는 주장하는 것에 대한 염려에 대해서는 나누지 않겠다. 나는 그러한 접근이 강력한 반응을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100년 동안 개신교 선교사는 계속해서 전진했고 대부분의 우리가 가고자 하지 않는 방향으로 그들이 따라 갔기 때문에 우리는 거의 홀로 남겨졌다. 그러나 만약에 그들이 창의성을 이슬람 세계에 대해 발휘하자마다 법칙은 변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보는 견해이다. 

 

내부자 지지자들은 무함마드를 보는 견해로 인해 엄청난 비난을 받는다. 자주 그러한 비난은 그를 선지자로 보느냐 아니냐에 따른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그 사람이 내부자 지지자인가와 반대자인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예이다. 내부자 지지자는 우리가 무함마드가 선지자임을 선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반면에 이 이슈는 주님을 사랑하는 무슬림 배경의 신자들관 연관된 것이다. 왜냐하면 꾸란에 그에 대해 쓰여져 있기 때문이다. 내부자 지지자들은 만일 무함마드가 궁극적인 하나의 진리로 인도한다면 왜 무함마드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긍정적인 관점으로 볼 수 없는가라고 말한다. 나는 어느 누구도 무함마드를 그리스도와 동일한 수준의 선지자라고 말하는 내부자 지지자를 만나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많은 내부자 지지자들은 실제로 무함마드에 대해 그들이 말하고 있는 바로 인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이야기 하지 않는 것으로 인해 판단을 받고 있다. 많은 내부자 지지자들은 무함마드를 부인하거나 이슬람의 한 측면에 대해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하는” 편이 되는 반면에 “반 이슬람”이 되기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반대자들은 지지자들의 침묵이 반대자를 믿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추측하며 주장한다. 이 점은 내부자 지지자들이(나를 포함해서) 그리스도의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강조하기 원하는 것이지 무함마드가 누구인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기독교 형제 자매들이 무함마드에 대해 긍정적인 어떤 표현을 할 때 거의 배교에 가까운 판단을 받는 것을 보게 된다. 많은 내부자 지지자들은 무함마드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그를 선지자로 본다는 것이 아니며, 역사적인 관점에서 그의 인생과 그가 개혁자로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다는 점에 대해 편안하게 말하고 있는 것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매우 불편하게 하는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주장하기를 “우리는 무함마드의 일생에서 부정적인 요소가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이 점이 그렇게 중요한가? 나는 올리버 크롬웰에 대해 그가 왕의 머리를 참수했다는 것을 빼고 좋은 점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허락된다. 또한 토마스 제퍼슨이 그의 종을 임신시킨 점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그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허용된다. 만일 우리가 무함마드의 긍정적인 요소나 그가 하나의 종교를 세운 사람으로 말한다면 사람들은 우리가 졌다고 인정하거나 그리스도를 모욕했다고 생각하겠는가? 나는 무함마드에 대해 그다지 호의를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과거에 살았던 한 사람이 우리 구주의 복음에 흠집을 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만일 내가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존경심을 갖거나 혹은 그를 무시하는 일을 선택해야 한다면, 분명 그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우리 주님이 가르치신 태도는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내부자이다. 왜냐하면 나는 무슬림 환경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전통을 거부하고 싶지 않다. 나는 내부자 지지자(insider proponent – IP)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부분 서구의 것이며 서구적인 사고와 전략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가 그러한 태도와 사람들을 좋아함에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C5”를 지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C-눈금이 아니라, 성육신이 교회개척의 모델로서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낙관적으로 (또한 순진하게) 우리 구주와 메시아 예수를 따르는 우리 모두가 순수하고 토착적이며 재생산이 가능한, 또한 서구의 돈에 의지하지 않는 무슬림 공동체와 그룹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통된 모습을 갖게 되는 것에 대한 목표에 동의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더불어 나는 어느 쪽에 대해 더 선호하는 실수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존경하며 서로가 동의하지 않는 바와 현상유지에 대한 도전에 대해 이단이라 정죄하지 않으면서 함께 일할 수 있는 날을 바라고 있다. 

 

더 나아가 나는 기독교인이 이슬람과 관계를 맺기 위해 더 이상 이슬람을 좋아하지 않을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나는 내 친구들과 서구에서 온 동료 사역자들에게 진심으로 솔직하게 그들 스스로가 무슬림들을 향한 그들의 태도는 정치적인 입장과 외국인에 대한 혐오와 후기 냉전 문명과 종교간 결투의 덫에 걸린 결과가 아닌가 라고 묻고 싶다. 내 형제와 자매들이 이러한 자기 반성을 하는 동안 나 자신도 내 눈에 있는 들보가 없는지 찾아 볼 것을 약속한다. 우리 주님의 평안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93. 설악포럼 2014-6: 로잔의 무슬림 선교 방향-옥스포드 컨설테이션에 참여하고서 (정마태)
     91. 설악포럼 2014-4: 이슬람과 미로슬라브 볼프의 알라에 대한 평가 (한스 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