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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포럼 2014-4: 이슬람과 미로슬라브 볼프의 알라에 대한 평가 (한스 큉) 프린트   
류재중  Email [2016-12-08 17:38:58]  HIT : 943  

어떻게 하면 기독교 하나님에 대해 대화를 무슬림과 함께 열어갈 수 있나?

이슬람과 미로슬라브 볼프의 알라에 대한 평가

한스 큉

 

우리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은 동일한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당연히 “절대로 그렇지 않다!”였다. 나는 이 대답을 전혀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인 반면에, 이슬람의 하나님은 단지 단일신론일 뿐인데, 어떻게 기독교인과 이슬람교도들이 동일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그렇게 단순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 글을 준비하며 알게 되었다. 한스 큉(Hans Küng)이 쓴 이슬람: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와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의 알라: 기독교 반응(Allah: A Christian Response)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결코 단순하게 만들지 않았다. 이 두 탁월한 학자들의 대답은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믿는 하나님이 동일하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것일까?

 

이 글은 과연 기독교의 하나님과 이슬람의 하나님의 동일한 분이라면, 어떻게 기독교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정하는 이슬람교에게 기독교 하나님이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이슬람교 하나님과 동일한 분임을 설명할 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큉과 볼프의 제안을 각각 살펴보고 나름의 평가를 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를 기초로 하여 과연 기독교와 이슬람이 동일한 하나님을 믿는다는 큉과 볼프의 주장에 대해 최종적으로 평가를 하고자 한다. 

 

한스 큉 – 헬레니즘적 그리스도론을 버리고 유대 기독교에서 출발하라

기독교가 타 종교와 대화를 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큉이 선택하는 것은 두 종교들 간의 공통성을 최대한 확보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공통점을 가지고 그 두 종교가 다른 종교들에 비해서 얼마나 가까운 지를 강조한다. 예를 들어, 이슬람교와 대화를 하는 기독교는 다른 무엇보다도 서로가 단일신론(monotheism)을 확고히 하고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이 두 종교가 다신론(polytheism)과 얼마나 다른 지를 드러내어 대화를 위한 이해를 도모한다. 

 

하지만 두 종교가 지닌 차이점으로 인한 대화의 갈등은 어떻게 할 것인가? 큉은 공통점의 기반 위에서 차이점에 대한 서로의 이해를 추구할 때 갈등은 완화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러한 원리에 따라서 큉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대화를 위한 하나의 방법을 그의 책 이슬람: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Islam: Past, Present and Future)에서 제시한다. 

 

큉은 주목하는 것은 당연히 정통 무슬림 사상이 반대하는 기독교의 그리스도론과 삼위일체론이다. 큉은 이 문제를 다루면서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신학적 대화를 촉진하고 나름대로의 건설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한다. 큉은 이슬람교가 기독교 삼위일체론을 반대하는 까닭은 그것이 너무나도 쉽게 삼신론으로 빠져 버린다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슬람교는 단순하게 한 분 하나님으로 확정이 되는 데 반하여, 헬라화 된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은 복잡하고 이해가 어려우며 결국에는 일반 사람들의 경우 삼신론과 차이를 구별하기 어렵다고 말하며, 이러한 이유로 실제로 근동과 북아프리카에서는 기독교가 거의 사라졌다고 말한다. 

 

큉은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그동안 서로를 향해 적대적인 태도로 방어를 해왔던 것을 중지하고, 새롭게 서로의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왜 서로 차이점만을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살펴 볼 것을 큉은 제안을 한다. 여기서 큉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비그리스도교 종교’에 관한 항목을 인용한다. 

 

교회는 또한 무슬림도 존중하고 있다. 그들은 살아 계시고 영원하시며 자비로우시고 전능하신 하느님, 하늘과 땅의 창조주,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유일신을 흠숭하고,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순종하였듯이 그들 신의 감추어진 뜻에 충심으로 순종하며, 아브라함에게서 이슬람 신앙을 이어받았다고 즐겨 주장한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예언자로 받들며, 또 그 분의 어머니이신 동정녀 마리아를 공경하여 때로는 그 분의 도움을 정성되이 간청하기도 한다. 또한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부활시키시어 공정하게 갚아주실 심판의 날을 기다린다. 따라서 그들은 도덕생활을 존중하며 특히 기도와 자선과 단식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여러 세기에 걸쳐 그리스도인과 무슬림 사이에 적지 않은 불목과 적대가 있었지만, 거룩한 공의회는 과거를 잊어버리고, 서로 이해하도록 진심으로 노력하며, 온 인류를 위하여 사회 정의와 도덕 가치, 평화와 자유를 공동으로 수호하고 증진하기를 모든 사람에게 권고한다. 

 

큉은 여기서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서로 대화를 열어가기 위해 필요한 화해의 정신을 본다. 그가 보기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타 종교에 대하여 자기 방어와 정죄의 영이 아니라 보편적인 화해와 이해의 영으로 충만하다. 큉에 따르면 이러한 정신에 따라 무슬림과 대화를 해 나갈 때 기독교가 유념하여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4세기 이후의 헬라적 기독교가 아니라 초기 유대 기독교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높인 헬라적 기독교와는 달리 유대 기독교는 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너무나 확실하여 하나님 이외에 다른 어떤 존재를 신격화 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이면서도 예수를 사람이 되신 하나님으로 믿지는 않았던 유대 기독교의 자리로 돌아간다면 이슬람교와 대화가 완전히 열려질 것이라고 큉은 확신을 한다. 유대 기독교의 기독론은 이슬람 꾸란의 기독론과 매우 유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 기독교의 예수와 꾸란의 예수

큉에 따르면 유대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기는 했지만 그것의 의미는 나중에 기독교가 고백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자기 백성을 구하려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메시아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예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메시야로 선택을 받은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단이 아닌가? 이단의 주장이 꾸란의 기독론과 유사하다고 하여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에 공통성이 있다고 할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큉은 이에 대해 율법과 할례를 지킨 유대 기독교인들이 양자론의 이단으로 낙인이 찍힌 것은 4세기나 지닌 후대의 일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큉의 말을 옮겨 보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예수 자신은 물론 예수의 처음 제자들,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대부분, 또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 선교사들도 모두가 유대인, 정확히 말해 ‘유대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사실이다(다른 무슨 가능성이 있는가?).그들이 원칙적으로 율법과 할례를 준수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단지’ ‘종말론적인’ 사람의 아들-그리스도론 혹은 ‘양자론적인’ 하나님의 아들-그리스도론을 주장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 모두가 무조건 이단인 것은 결코 아니다. ...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동등하게 보는(‘본질적인 동등함’homoousios) 니케아 공의회(325년)의 결과를 기준으로 그 이전의 모든 그리스도인을 평가한다면, 유대 그리스도인들만 이단이 아니라 처음 3세기 동안 활동했던 희랍 교부들도 거의 다 이단일 수 밖에 없다. 그들의 가르침은 ‘아들’을 ‘아버지’ 밑에 두는 것(종속론 subordination)을 당연시했으니 말이다. 교회의 처음 삼백 년 역사 속에서 도대체 누가 정통이었겠는가? 

 

니케아 공의회(325년) 이전에 개진되었던 다양한 신론과 기독론의 주장들을 후에 확립된 교리로 소급하여 정죄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판단한 큉은 매우 자유롭게 유대 기독교인들도 또한 초기 기독교의 합법적인 상속자임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제 유대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바라본 관점으로 돌아가는 것은 기독교의 이해와 관련하여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큉이 발견한 유대 기독교와 꾸란의 예수와의 유사성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은 정통 기독교가 믿는 삼위일체 교리의 관점에서 보면 용납하기 어려운 고백들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관련한 고백이다. 꾸란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다. 꾸란이 인정하는 예수는 하나님의 메시아이며 말씀이며 하나님의 영이며, 또한 종이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들은 예수의 신성을 전혀 의미하지 않는다. 메시아는 “단순히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 죄에서 씻음을 받은 사람, 축복을 받은 사람”을 뜻한다. 말씀은 “태초부터 존재하는 신적인 존재, 나아가 어떤 신적인 ‘위격’이 아니라, 예수라는 존재의 근원이 되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의 영이라는 말은 처녀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한 것인 하나님의 영으로 된 일을 뜻할 뿐이며 “예수의 신성에 대한 증거가 아니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징표일 뿐이다. 또 예수가 행한 모든 이적들은 그가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행한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종”이라 일컬어졌으며, 어떤 인간에게도 붙여질 수 있는 호칭이다. 이슬람의 꾸란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 그것이 예수를 결코 무시하거나 폄하하지 않음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예수를 결코 하나님 그 자체로 숭배하지 않음을 확실히 한다. 

 

큉은 여기서 유대 기독교의 예수에 대한 이해 또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된 까닭이 예수의 탄생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으로 인한 것임을 주목한다. 큉은 예수께서 살아있는 동안 자신을 스스로 하나님이라 일컬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어째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오직 하나님 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는 성경 말씀은 예수가 스스로 자신의 신성을 부인한 것이라고 말한다. 신약성경에서 나오는 ‘그 하나님’(ho theos)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이실 뿐이며 예수에게는 적용된 일이 없는 것도 예수의 신성을 부인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예수의 신성은 어떻게 고백하게 되었을까? 큉은 오직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일어난 일이라고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받아 주셨다고 믿고 난 후에야 비로소 신앙 공동체는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아들로 고백하였다는 것이다. 이 고백은 부활한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심으로 그가 하나님 아버지와 ‘본질상의 연합’(community of essence)은 아닐지언정 ‘왕좌의 연합’(throne community)을 이루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시편 2편 7절의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는 말씀이 사도행전 13장 33절에서 부활과 관련하여 언급이 되고 있는 것은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께서 왕권의 자리에 임명이 되었음을 뜻한다는 것이다. 큉은 이것이 히브리적인 구약성경의 의미로 고백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에 대한 신앙이라고 결론을 짓는다. 

 

더 나아가 큉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부인하는 꾸란에 대해서도 유대 기독교와의 공통성을 찾아 내고자 한다. 큉은 꾸란이 증거가 확실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부정하는 것은 역사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단지 신학적 의미에서 그러한 것이라고 말한다. 신학적 의미에서 볼 때, 예수의 죽음은 곧 하나님의 말씀의 죽음을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에 의해서 파괴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의 죽음 또한 부정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큉이 인용한 무슬림 학자 마흐무드 아윱(Mahmud Ayoub)은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에 대한 부정은 영원히 승리하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이 감히 제압하거나 파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즉 인간의 능력에 대한 부정이다.” 

 

 큉은 이처럼 꾸란이 예수의 죽음에 대한 부정을 통해서 의미하고자 했던 바는 기독교인도 무슬림과 함께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바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바로 그를 보내신 분과의 친밀한 관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서 큉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초기 유대 기독교는 초기 이슬람과 서로 친척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주장을 한다. “요컨대 그리스도교는 꾸란의 예수 이해를 더 이상 무슬림 이단 사상으로 간주할 것이 아니라, 아라비아의 토양 위에서 초기 그리스도교의 특성을 받아들인 그리스도론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교리가 아니라 성경을 대화의 출발점으로 

이제 큉은 유대 기독교의 기독론에서 헬라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으로 주제를 옮긴다. 그의 문제의식은 예수의 유대인 제자들조차도 이해를 하지 못하는 해석을 무슬림들이 어떻게 이해를 할 수 있겠는가에 있다. 4세기 니케아 공의회 이후 갑바도시안 세 교부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고전적 삼위일체 교리에 따라 기독교 하나님은 ‘세 위격-한 본질’로 표현이 되는 하나님이 되셨다. 큉은 이러한 삼위일체의 교리가 매우 사변적이며, 지적으로 난이도가 매우 높은 고도의 수학공식과도 같다고 평가를 한다. 본래 신약성경에는 셋의 하나 됨을 강조하는 삼위일체가 아니라 그저 소박한 삼중(triadic) 고백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삼중 고백이 아무도 이해할 수가 없는 교리로 발전이 되었음을 애석히 여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큉은 그 이유를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 곧 기독론에 있다고 올바르게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큉은 이어 말하기를 노베르 브롱스(Norbert Brox)와 같은 교회사가의 말을 인용하여 “‘하느님’이라는 단어를 로고스에게까지 사용하는 것은 하느님의 절대적인 통치와 유일성을 너무나 위태로울 정도로 불명확하게 만드는 것이다.”고 옮긴다. 그 결과 사변적이며 복잡한 삼위일체 교리를 정통으로 확립한 기독교는 성경의 언어에 충실한 신앙고백을 사람들을 교회정치적 소수자로 내몬 반면에, 오히려 꾸란은 이러한 사람의 견해를 편들고 있다고 큉은 말한다. 

 

큉은 4-5세기에 형성이 된 헬레니즘의 교리를 기준으로 말하지 말고, 성경을 다시 읽고 논의를 출발할 것을 권한다. 신약성경을 펼치고 읽어보면 고전적인 삼위일체 교리, 곧 동일한 신적 차원의 하나됨을 말하는 구절이 하나도 없음을 강조한다. 

 

... 성서에서 새롭게 출발하게 되면 그 즉시 알게 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유대 그리스도교 안에서, 나아가 신약성서 전체에서 아버지 하느님·아들 예수·하느님의 거룩한 영에 대한 신앙은 있지만 ‘셋이면서 하나인 하느님’, 즉 ‘삼위일체’에 대한 가르침은 없다는 사실이다. 사도신경도 삼위일체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큉은 이처럼 성경을 돌아가서 삼위일체의 사변적 교리의 부재를 확인시킨 후에, 이제 무슬림에게 기독교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하여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의 설명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한 권능과 보좌에 앉아 있도록 임명을 받은 인간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대리자이며 하나님을 향해서는 인간의 대리자이다. 큉의 이러한 설명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의 존재론적인 관계를 설명하려는 시도를 버리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분이 무엇을 하셨는지를 보여주는 노력을 하자는 주장을 제기한다. 

 

큉의 판단에 기독교회는 세 번에 걸쳐서 삼위일체론과 관련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겪어 왔다. 하나는 유대 기독교 패러다임이며, 다른 하나는 초대 교회 헬레니즘 패러다임이고, 마지막 하나는 라틴 중세 패러다임이다. 세 위격, 한 본질이라는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는 두 번째 초대 교회 헬레니즘 패러다임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며, 세 번째 라틴 중세 패러다임을 걸쳐서 스콜라 신학의 틀 안으로 변화를 겪어 왔다. 두 번째 패러다임 안에 있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나 세 번째 패러다임 안에 있던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모두 나름의 시대적 한계 내에 있던 사변적 신학자들이었다. 큉은 이러한 관찰 끝에 “그들이 정리해낸 삼위일체 교리는 신약성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메시지와는 완전히 일치되지 않는다.”고 단언을 한다. 

 

교리가 아니라 성경을 대화의 출발점으로 삼는다고 할 때, 기독교인은 무슬림들에게 어떻게 성부, 성자, 성령을 설명하게 된다는 것일까? 큉은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성부는 유일하신 한 분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며, 그 분 외에 다른 신은 없다. ... 유일신 신앙과 다신주의 사이에 제3의 신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자는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람 예수, 나자렛 예수 외에 다른 누구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는 한 분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자신의 인격 안에서 제시한다. 한 분이신 참된 하느님은 그 예수 안에서 참으로 나타나시고 현존하시고 활동하신다. ... 성령은 하느님의 거룩한 발현이요 능력이며, 그 하느님께로 올라간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발현이요 능력으로서 모든 신자들과 신앙 공동체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계시며, 모든 사람을 하느님의 아들과 딸로 만드신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제3의 신성이 아니라 하느님 자체를 의미한다. 성령은 하느님의 강력한 영적 현존이며 실재다.

 

큉의 주장은 한 가지 목표를 위하여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 목표는 종교 간 대화이다. 큉은 자신의 주장이 지나온 교회의 역사를 부정하며 모든 교리를 버리자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한다. 큉은 교리와 신앙고백이 기독교 교회의 내적인 상호이해를 위해서는 여전히 필요하며 중요한 진리 추구의 표준이며, 믿음과 생각의 기준이라고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 간이 대화에서는 교회 내의 그리스와 라틴 전통을 기준으로 삼아서는 되지 않는다고 역설한다. 큉의 인식에, 지금은 신학적이며 교리적 논쟁을 전개하던 중세도 아니며 종교개혁시대도 아니며, 현대와 현대 후기의 종교 간 대화의 상황이 요구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미로슬라브 볼프 – 삼위일체 신론이 단일신론임을 말하라

볼프는 큉과는 달리 기독교의 고전적 신앙고백인 삼위일체 신관을 그대로 가지고서도 이슬람과 대화를 열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대화의 가능성은 기독교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슬람의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심을 설명하는 데에 따라 달려 있다. 볼프는 그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믿는다. 기독교 삼위일체론은 결코 삼신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볼프는 “오늘날 깊은 갈등 가운데 있는 무슬림들과 기독교인들이 동일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물은 후에, “그렇다”라고 분명한 답을 내린다. 설령 볼프는 자신의 이러한 생각에 동의를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이러한 답의 가능성을 찾아가고자 하는 노력의 중요성을 그들에게 강하게 설득하고자 한다. 볼프는 그의 책 Allah: A Christian Response을 열어가는 서론에서 이러한 답을 찾아 가야 하는 필요성 또는 유익성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평화로운 공존의 삶이다: “무슬림들과 기독교인들이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신들을 예배한다는 주장은 싸우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서로 평화롭게 사는 데에는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볼프의 생각에, 만일 무슬림과 기독교인들이 동일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사실이 고백될 수만 있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이해에 대해서 서로 자유롭게 말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그들 모두의 삶을 이끌어 가는 중요한 가치에 있어서 공통점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동일한 하나님인가? 어떻게 동일한 하나님을 밝힐 수 있단 말인가? 볼프는 이러한 생각을 개진할 때, 무슬림들과 기독교인들의 신 이해가 서로 다른 점들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며, 또한 평화로운 공존의 삶을 위하여 실제로는 서로 다른 신들을 동일한 신들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볼프가 생각하는 과제는 “두 하나님들을 동일한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두 하나님들이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찾아내는”하는 것이다.  볼프는 큉이 그러했던 것처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우리의 세상에 대하여(Nostra Aetate)를 언급을 하며 자신의 주장에 지지를 호소한다. 우리의 세상에 대하여는 무슬림들이 전심으로 아브라함이 믿는 것과 같은 하나님을 믿으며, 그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자존하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전능하신,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신 한 분 하나님”이시라고 말한다. 이러한 기독교인의 관점을 반영하여 말한다면, 만일 무슬림이 기독교인이 믿는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을 믿는다면, 무슬림의 하나님은 결코 “살아계시며 자존하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전능하신,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신 한 분 하나님”이실 리가 없으며, 거짓된 신에 불과하게 된다. 이러한 볼프의 주장은 만일 무슬림들이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진실로 “살아계시며 자존하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전능하신,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신 한 분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무슬림의 하나님은 기독교의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일 수가 없으며, 또한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과도 다르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주장은 결국 무슬림들은 기독교인들이 삼신론을 믿는 것이 아니며 무슬림들과 마찬가지로 단일신론을 믿는 것임을 이해하여야 할 것임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기독교가 삼위일체를 고백할 때 결코 하나님의 하나이심, 곧 단일신론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무슬림들은 이슬람의 하나님과 기독교의 하나님이 하나이며 동일하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기독교의 중심 신앙으로 인하여 하나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성격, 곧 하나님의 하나 됨이 훼손을 끼쳤다고 또한 믿는다. 

 

삼위일체론이 삼신론이 아니라 단일신론임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러나 볼프의 주장이 과연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볼프는 그 가능성을 중세 15세기의 신학자 쿠사의 니꼴라스(Nicholas of Cusa, 1401-64)에게서 이미 발견한다. 이 때는 십자군 전쟁의 소용돌이와 그 여파가 계속되고 있었던 시대였다. 하지만 니꼴라스는 이 때 이미 이슬람과의 평화로운 대화를 시도하는 평화로운 신앙에 대하여(De pace fidei) 의 글을 썼다. 볼프는 니꼴라스가 무슬림들을 상대로 꾸란의 교훈에 비추어 기독교의 하나님을 변증한 내용을 요약하여 제시한다. 볼프에 따르면, 쿠사의 니꼴라스(Nicholas of Cusa)는 기독교 하나님에 대한 무함마드의 오류와 악의의 이유가 무지에 있다고 주장을 하였다. 

 

1. 꾸란: “한 분 하나님 이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다.”(알 마이다, 5:73)

니꼴라스: “몇 분의 하나님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된 말이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이들 가운데 누구도 최고의 영광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 가운데 누구도 하나님이지 않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최고의 영광을 가진다.

 

2. 꾸란: “알라는 삼위일체의 셋 가운데 하나이다”고 말하는 이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알 마이다, 5:73)

니꼴라스: 하나님은 결코 삼위일체의 셋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단일한 하나 됨”이시다; 세 신적 위격들은 “하나 됨 안에서의 셋이지 숫자적으로 셋이 아니다.”

 

3. 꾸란: (예수님이 말씀하신 기독교 주장을 진술하면서) “알라를 훼손하여 [또는 제쳐 놓고] 나와 나의 어머니를 신들로 예배하라”(알 마이다, 5:116)

니꼴라스: 그리스도는 결코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신이나 그의 어머니를 예배하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

 

4. 꾸란: “알라는 아들을 낳은 적이 없다.”(알 무미눈, 23:91)

니꼴라스: (a) 무슬림들과 더불어,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다른 하나님인 아들을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을 한다. (b) 하나님은 육적인 분이 아니며 문자적 의미로 아들을 낳으실 수가 없다; 하나님에게 있는 아들 됨이란 ‘지성적 아들됨’이며, 그렇기 때문에 “말슴”과 “아들”은 서로 바꾸어 사용할 수 있다. ©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그래서 “아들”의 출생은 영원하며, 하나님 옆에 스스로 서 있는 어떤 존재를 낳는 것이 아니다.

 

5. 무함마드(자신 보다 앞서 왔던 예언자들과 자신이 말한 “최고”의 것들을 요약하면서): “하나님, 그 분 외에는 어떤 하나님도 없으며, 그는 어떤 동료도 없다.”

니꼴라스: “삼위일체를 고백하는 것은 여러 신들이 연합을 부인하는 것이다.”

 

위에서 길게 요약한 니꼴라스의 꾸란에 대한 반박을 소개한 볼프는 니콜라스의 결론을 요약하여 제시한다. “꾸란은 삼위일체에 대한 기독교의 참된 교리를 부정하지 않으며, 단지 이 교리에 대해 잘못 알려진 것을 반대하며, 그것은 오히려 올바른 반대이다.” Miroslav Volf, Allah, p. 54.

 

니꼴라스의 글을 인용한 볼프는 이제 자신이 무슬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쉐이키 하비브 알리 알-지프리(Sheikh Habib Ali al-Jifri)와 대화를 나누며 겪었던 경험을 소개한다. 세이키 알-지프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에게는 “단지 하나의 신성과 실재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 오래된 정통 기독교 교리라는 사실에 놀라워 하며 궁금해 했다. 볼프는 그에게 기독교 삼위일체론은 오직 “숫적으로 하나 뿐인 실체적 단일성”(the numerical identity of the divine substance)을 말해 주었고, 그 결과 밤 늦게 대화가 이어졌다고 말한다. 토론의 주제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사실에 있지 않았다. 주제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에 있었다. 볼프는 이제 모든 무슬림과의 대화의 핵심은 “하나님의 하나 됨을 어떻게 설명을 하여 주는가에 있음을 확신하였다. 만일 이 점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면 무슬림들은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은 이슬람의 하나님과 기독교의 하나님이 서로 다른 하나님이라는 결론을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설명을 어떻게 하나? 

 

볼프는 삼위일체론이 결코 세 개의 신적 본질(three divine essences)을 뜻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의 실체적 단일성(one substantial unity)만을 인정할 뿐이

라고 말한다. 그리고 분리되지 않은 채 하나인 신적 셋 사이에 있는 친밀성(the intimate connection between the divine Three who are indivisibly one)을 설명하기 위한 두 가지 길이 있음을 지적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외향적 사역(God’s acts toward the outside), 곧 창조, 구속 그리고 완성에 이르게 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활동은 분리되지 않으며, 또한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교리이다. “각 위격의 활동마다 모든 세 위격들에 의하여 항상 행하여진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신적 위격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방식과 관련한 것으로 상호내주(mutual indwelling), 곧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고 일컬어지는 교리이다. 볼프는 어거스틴을 인용하여 설명하기를, 이 교리에 따르면 세 위격들은 “언제나 서로 안에 있으며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성령은 항상 아들 안에 있으며; 아들 됨이란 이러한 상호내주의 관계를 인정하는 범위에서만 인정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이 단지 말로만 단일신론을 말할 뿐, 실제로는 세 본질들을 말하지 않느냐는 무슬림들의 의문을 충분히 해소할 수 있을까? 볼프는 이러한 오해를 지우기 위하여 말씀이신 한 인격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육신한 것이 아니라고 덧붙여 놓는다. 볼프가 이러한 설명을 하는 까닭은 세 위격들 가운데 한 위격만 성육신 한 것이라면 신적 본질은 하나가 될 수가 없다는 한 무슬림 학자의 주장 때문이다. 성육신 한 위격의 본질과 그렇게 하지 않은 다른 위격의 본질들의 차이로 인하여 다신론이라는 결론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으로 볼프는 앞서 설명한 기독교 삼위일체론의 두 교리를 상기시킨다. 곧 세 위격들이 서로 안에 내주하신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 밖을 향한 하나님의 활동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볼프는 주장하기를 비록 성경에 이르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며(요 1:1-2, 14), 그 말씀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하지만(요 1:1-2, 14), 이러한 성경의 교훈이 예수 안에 거하시는 위격은 오직 “말씀” 한 분만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비록 한 위격만이 성육신 하였다 하더라도, 모든 세 위격들이 성육하신 그 위격 안에 임재하시어 활동을 하시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이다

이상의 설명을 통해 볼프는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이 이슬람이 단일신론에 어긋난다는 비판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꾸란이 삼위일체론을 배격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꾸란이 비판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 정통 교리에 따른 삼위일체론이 아니다. 기독교 정통교리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무슬림들의 기본 신앙을 문제를 삼지 않으며, 삼위일체의 “셋”은 결코 하나님의 “하나 됨”(oneness)을 해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볼프는 기독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슬림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반대하는 것이나, 이러한 반대가 기원하는 하나님의 한 분이심에 대한 타협없는 강조는 그 자체만으로 기독교인들이 무슬림들과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으로 다르게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만한 충분한 이유들을 주지 않는다.” 요컨대 볼프의 주장은 이슬람이 반대하는 것은, 곧 삼신론은 기독교도 반대하며, 이슬람이 확언하는 것은, 곧 단일신론은 기독교도 확언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주장만으로 기독교의 하나님과 이슬람의 하나님이 동일한 하나님이라고 말하기에 충분한 것일까? 지금까지 볼프가 말한 것은 무슬림들 생각에 기독교 삼위일체론이 다신론을 말한다는 비판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설명을 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하나님과 이슬람의 하나님이 동일한 하나님이라고 말하려면, 이번에는 이슬람의 하나님도 또한 삼위일체적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기독교의 시각에서 볼 때, 이슬람의 하나님은 삼위일체를 부정하므로 무슬림들은 다른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비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볼프는 질문을 바꾸어 묻는다. “기독교인들은 ... 유대인들이 자신들과 동일한 하나님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결론을 짓는가?” 볼프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답을 내린다. 볼프는  대부분 유대인들이었던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히브리 성경의 하나님과 그들의 동족인 유대인들의 하나님이 바로 그들이 예배하는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일관되게 전제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말하기를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과 논쟁을 벌였던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표현의 문제, 곧 삼위일체인가 아닌가의 문제였으며, 또한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방법에 대한 문제,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였다고 덧붙인다. 요컨대 기독교인이 유대인들과 벌인 논쟁의 핵심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동일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느냐의 문제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슬람의 하나님이 기독교의 하나님과 동일하다고 보는데 장애가 되는 문제는 없다고 볼프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동일하게 히브리 성경을 사용하는 반면에 무슬림들은 꾸란을 사용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프가 보기에 이슬람의 하나님은 기독교의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라고 할 만한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믿음과 관련한 것으로 다음의 여섯 가지를 제시한다. “(1) 오직 한 하나님, 하나이며 유일한 신적 존재만이 존재한다; (2)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3)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신 모든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4) 하나님은 선하시다; (5) 하나님은 우리의 전 존재를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을 하신다; (6) 하나님은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들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을 하신다.”  또 다른 근거는 신앙의 실천과 관련한 것으로 두 가지를 제시한다. “(1)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이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와 이슬람의 규범적인 가르침을 포용하는 한, 그들은 동일한 하나님을 믿는다; (2)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한, 그들은 동일하며 참된 하나님을 예배한다.” 

볼프는 이 정도의 유사성이면 그것은 동일한 하나님이라고 판단을 내리기에 충분하고 판단을 내린다. 그리고 그 충분성은 비록 무슬림이 삼위일체론을 배격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무슬림이 동일한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말할 만큼 크다고 판단을 한다. 어떻게 삼위일체론을 부인하더라도 여전히 무슬림들의 하나님이 기독교인들의 하나님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여기에 볼프의 주장의 핵심이 자리하고 있다. 삼위일체론에 대한 무슬림들의 반대는 삼위일체론을 오해하여 비롯된 것이며, 그럼으로써 무슬림들이 하나님의 참된 성품을 오해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평가(1): 무슬림과의 대화? 큉 – 위험하며 받을 수 없는 길

지금까지 살펴본 바대로 큉과 볼프는 이러한 기독교의 단일신론을 주장할 때 이슬람 교인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인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을 제거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처방을 내 놓았다. 큉과 볼프는 모두 기독교 신론이 삼위일체론을 공식 교리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론이 다신론이 아니라 단일신론임을 주장하는 것이 이슬람과의 대화를 위한 핵심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또한 큉과 볼프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우리 시대에 관하여(Nostra Aetate)를 인용하면서 무슬림과 대화를 할 때 우선적으로 필요한 정신은 자기 방어와 정죄의 영이 아니라 보편적인 화해의 정신임을 강조하는 데에 있어서도 공통적이다. 공의회는 이슬람과의 대화를 위하여 아주 중요한 한 결정을 제시해 주었는데, 그것은 무슬림이 예배하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서 이어받은 신앙이며, 따라서 기독교의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주장을 사실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큉과 볼프는 둘 다 이 점에 대한 공의회의 결정을 받으며 그것을 동의하고 지지한다. 

 

그러나 큉과 볼프는 무슬림들에게 어떻게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이 단일신론인지를 설명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론에 있어서 견해가 갈라진다. 큉은 4세기 이후의 헬라적 기독교의 형식이 아니라 초대 유대적 기독교의 자리에서 무슬림과 대화를 시작할 것을 말한다. 반면에 볼프는 오히려 4세기 이후의 헬라적 기독교가 공식화한 교리를 잘 풀어 나가는 것으로 대화를 열어갈 것을 말한다. 큉은 기독교의 하나님과 이슬람의 하나님이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함에 있어서 헬라적 기독교에 의해서 교리화된 삼위일체론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은 장애만 될 뿐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볼프는 무슬림들이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배격하는 것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므로 삼위일체 교리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오히려 올바른 길이라고 판단한다. 

 

큉과 볼프 가운데 누구의 방법론을 선택하여야 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큉의 방법론은 적어도 두 가지 근본적인 이유로 인하여 받아들일 수가 없는 너무나도 위험한 제안이다. 첫째, 큉의 방법론은 규범화된 교리로서의 기독론을 인정하지 않는 위험성을 전제한다. 교리가 형성되기 이전인 초기 유대 기독교의 자리로 돌아가서, 마치 그 이후의 교리 발전에 따른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이 없는 것처럼 성경의 사실만을 가지고 논의를 하자는 것이 큉의 제안이다. 왜 그래야 할까? 큉의 생각에 그렇게 하면 분명 초기 유대 기독교의 기독론과 꾸란의 기독론 사이에 상당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도 살핀 것처럼, 꾸란의 기독론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큉 자신이 설명한 대로 꾸란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메시아이며 말씀이며 영이며 종이라 일컬어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표현들은 결코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는 표현들이 아니다. 그런데 큉은 여기서 초기 유대 기독교인들도 무슬림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목한다. 초기 유대 기독교인들도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않았으며 양자론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사성은 기독교의 하나님과 이슬람의 하나님의 동일한 하나님임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초기 유대 기독교인들의 양자론적인 기독론이 기독교의 올바른 교리가 아니지 않은가? 그것이 어떻게 기독교의 기독론을 바르게 대변할 수가 있겠는가? 큉은 이 점에 대해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기독론은 4세기 이후에야 확립이 된 것임을 지적한다. 따라서 그 이전의 기독교 내에서 개진된 다양한 기독론에 대해서는 나중에 확립된 교리 기준에 따라서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니케아 신조(325년) 이전에는 이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큉의 주장은 일면 정당성을 가지고 있으나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과연 4세기 이전의 양자론을 주장한 사람들을 가리켜 정통 교리에 비추어 이단의 오류를 범했다고 정죄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한 양자론의 교리가 기독교의 기독론을 올바르게 대변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양자론의 주장에 대해서 시대를 소급하여 이단의 정죄를 할 수는 없지만, 양자론이 기독교의 기독론을 올바르게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무슬림에게 소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둘째, 큉은 유대주의 기독교의 양자론이 어찌하여 정통 교리로 인정을 받지 못했는지에 대해 충분한 고찰을 주고 있지 않다. 유대 기독교의 양자론이 무너진 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단순히 신학방법론의 패러다임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큉은 초대 교회에서의 유대주의 기독교의 자리로 돌아가자고 하지만, 우리가 돌아가야 할 자리는 성경 안에서 그려지고 있는 기독교의 자리이다. 성경이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데 후대 교회가 예수의 신성화를 만들어 낸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후대 교회는 우상숭배의 죄악을 범한 것이며, 기독교를 향한 이슬람의 비난은 정당한 것이 된다. 큉의 주장을 따라가면, 적어도 니케아 공의회 이후의 기독교는 우상숭배라는 죄악을 범했다는 정죄를 피할 수가 없다. 그러나 성경이 만일 예수의 신성을 주장한다면, 즉 성경 속에 있는 유대인 사도들이 예수의 신성을 주장한다면, 큉의 방법론은 그 기초부터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도대체 어떻게 하여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기독론이 치열한 교리 논쟁 가운데 최종적인 승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큉이 말하는 초기 유대 기독교인들보다 더 근원적으로 기독교를 대변하는 유대인 사도들이 에수의 신성을 고백을 하기 때문이 아닌가? 양자론을 주장하는 유대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유대인 사도들보다 더 우선적일 수가 없는 것이다. 성경의 예를 들어보자.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사건이 나온다. 유대인들은 이일과 관련하여 예수님을 박해하였는데,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절)고 답을 하셨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하셨을 때, 이 말씀이 큉이 말하는 유대 기독교인들의 이해에 따라 부활 이후에 왕권의 자리에 오른 일을 가리키는 의미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됨을 뜻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에서 확인이 된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18절) 이 구절이 무엇을 뜻하는가? 이 구절은 대답을 하신 예수나 그의 말을 들은 유대인이나 모두 예수의 말이 예수의 신성을 뜻하는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음을 뜻한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54절) 예수께서는 여기서 자신에 대해 어떤 의미로 이 말을 한 것일까? 양자론적인 의미인가 신성의 의미인가? 이 질문의 답은 예수의 말씀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보인 반응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58-59절)

 

왜 유대인들이 예수를 돌도 치려 했던 것일까? 답은 예수의 신성 주장 때문이다. 

 

마태복음 26장에 예수께서 체포가 되어 대제사장이 심문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대제사장이 에수께 묻기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말하라고 하였다.(63절) 어떤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에 대해서 물은 것일까? 예수님께서 대답을 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64절) 이 말에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기를 “너희가 지금 이 신성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65절)고 하였다. 그리고 사형에 처하여야 마땅하다고 판결을 내렸다. 무엇 때문인가?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성을 가진 자임을 말씀하였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예수께서 성육신하기 이전의 관점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하는 구절들이 있다. 예를 들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의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리라.”(요 1:18)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갈 4:4) 등이다.

큉은 말하는 유대 기독교인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는 이들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신성을 믿는 유대 기독교인들과 이를 믿지 못하는 유대 불신자들이 나올 따름이다. 양자론이 이단이 된 까닭은 신학의 패러다임이 히브리적인 데에서 헬라적인 것으로 변화를 하였기 때문이 아니고 성경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성의 신앙고백을 바르게 반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큉은 교리가 아니라 성경을 대화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올바른 기독론에 근거한 삼위일체의 규범적 교리를 떠나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의 신성을 증거함으로서 니케아 공의회 이후의 삼위일체 교리가 바로 기독교의 올바른 하나님을 대변하고 있음을 증거한다. 성경은 큉이 잘못된 매우 위태로운 방법론을 주장하고 있음을 오히려 말해 주고 있다. 

 

초기 유대 기독교인들의 양자론적 기독론에 따라 무슬림과 대화를 하자는 큉의 제안은 결국 꾸란의 기독론에 따라 기독교의 기독론을 일치시키고, 이제 서로 동일한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자는 것이다. 무슬림이 이러한 기독교인의 시도를 잘 받아 줄까? 그들이 기독교인들에게 당신의 기독론은 기독교계의 이단적 주장이니 당신들과의 대화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독교와의 대화라고 볼 수 없다고 하지 않을까? 

 

평가(2): 무슬림과의 대화? 볼프 – 유익하나 기대하기 어려운 길

볼프의 방법은 간단하다. 기독교 심위일체론에 대한 이슬람의 배격은 올바른 삼위일체론이 단일신론을 거슬리지 않는 다는 것에 대해 알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무슬림을 만나면 삼위일체 신론이 단일신론임을 말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이 다 같이 동일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음을 확인하라는 것이다. 그 길에 서로를 이해하는 대화의 가능성이 열려진다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말해서 올바른 방향으로 평가된다. 

 

볼프의 제안이 적절한 것으로 평가되는 중요한 이유는 그가 무슬림과의 대화를 위하여 기독교의 규범적 교리를 약화시키거나 훼손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이 점에 있어서 볼프는 큉과 확실히 구별이 되며, 그런 점에서 볼프의 제안은 큉의 것보다 더 적절하며 옳은 방향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볼프는 교리를 훼손하기는커녕 오히려 교리의 올바른 이해를 통하여 무슬림들이 기독교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바로 잡는 노력을 강조한다. 구체적으로 삼위일체론이 결코 다신론을 지지하거나 신적 본질이 셋이 있음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볼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 본질의 단일성을 뒷받침하는 두 가지 교리를 제시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외향적 사역은 분리되거나 나누어지지 않는다는(Opera Trinitas ad extra sunt indivisa) 교리이며, 다른 하나는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고 불리는 세 위격의 상호내주(mutual indwelling, circuminsessio) 또는 상호침투(mutual interpenetration, circumincession)의 교리이다. 

 

이 두 가지 교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실체적 혹은 본질적 단일성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서방신학과 예를 들어, 어거스티의 말을 살피면, 위격들의 비분리적 활동(undivided acts of divine Persons)의 교리와 관련하여, 이렇게 정리한다.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 한 창조주이시며 한 하나님으로서 피조물에 대하여 한 기원(Beginning) 또는 한 근본원리(Principium)이다.  Augustine, On the Trinity 5.14.15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vol. III (Grand Rapids: Eerdmans, 1993 reprinted), p. 95를 볼 것. 한편 상호내주 또는 상호침투의 페리코레시스 교리와 관련하여 어거스틴의 말은 이러하다. “삼위일체의 세 위격들의 관계는 서로에게 대하여 상호적으로 결정이 되어 있으며, 또한 그들 스스로가 본질상 무한하다. 그러나 유한한 세계에 있어서는, 어느 하나의 것이 다른 세 개의 합만큼의 크기를 지니지 않으며, 어떤 두 개의 합은 하나의 것보다 더 많다. 그러나 높고 높은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한 위격이 세 위격들의 합과 크기가 같으며, 또 어떤 두 위격들의 합이 다른 한 위격의 크기와 같다. 그들은 그들 자체가 무한한다. 그러므로 각 위격은 각 위격의 안에 있으며, 모든 위격들이 각각의 위격 안에 있고, 각각의 위격이 모든 위격들 안에 있으며, 모든 위격들이 모든 위격들 안에 있고 모든 위격들이 하나이다.” 동방신학 두 교리와 관련하여 동방신학의 지지도 견고하다. 12세기에 열린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성부에게만 드려지는가 아니면 성 삼위일체께 드려지는가의 논쟁이 있었으나, 위격의 사역의 비분리성의 교리에 의하여 바르게 정리가 되었다. “소테리코스(Soterichos)는 ‘희생제사는 성부께만 드려진 것이다’는 자신의 견해를 ‘드림’과 ‘받음’의 사실들이 각각 성자와 성부의 위격적 특성들을 구성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정당화하였다. 메톤의 니콜라스(Nicholas of Methone)는 이 주장 안에 한 가지 중요한 잘못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즉 경륜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일하심 혹은 활동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격적 특성들’(hypostatic characters)로 혼동하는 잘못이다. 왜냐하면 피조계를 향한 (ad extra) 하나님의 모든 활동들은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하나님 모두가 참여하는 활동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참여는 위격에 따른 것임은 두말 할 여지가 없지만, 그들의 활동은 본질상 하나이기 때문이다.” 또 페리코레시스 교리는 동방신학에서 기원한다. 예를 들어 페리코리시스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위(僞)-알렉산드리아의 씨릴(Pseudo-Cyril of Alexandria)는 이렇게 말한다. “...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세 하나님들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한 하나님,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말한다. 성자와 성령 하나님은 하나의 동일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사벨리우스가 수축시킨 것처럼 혼합되거나 합성되신 것이 아니다 ... 왜냐하면 ... 그들의(세 위격들의) 하나됨은 혼동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결합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들은 합성되거나 혼합됨이 없이 서로의 안에 내주함(περιχὠρησιν)을 갖는다.” 모두 다 같이 인정을 하는 대표적이며 핵심적인 삼위일체 교리라는 점에서 볼프의 설명은 매우 적절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렇지만 볼프가 기독론의 문제에 대해 다소 가볍게 지나가는 것은 커다란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비록 삼위일체론이 단일신론과 어긋나지 않는다는 설명이 무슬림들에게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실 사변적인 동의에 그친다. 삼위일체론의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기반은 기독론에 있다. 따라서 볼프의 제안이 무슬림들에게 현실적인 효과를 낳으려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구체적이며 확실한 신성의 고백을 받아드릴 때에라야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무슬림이 그럴 수가 있을 것인가? 만일 그들이 그렇지 못하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인지? 혹은 볼프가 종교간 평화로운 대화를 위하여 동일한 하나님에 대한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며 긴요하다고 하였는데, 과연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무슬림들과 기독교인들이 종교적 동질감을 갖을 수가 있을까? 

 

사실 무슬림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견해를 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은 이미 볼프도 하고 있는 바이다. 볼프는 꾸란의 어느 구절은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고 주장을 한다. 예를 들어 다음의 구절이다. “마리아의 아들, 그리스도는 한낱 메신저가 아니다; 그보다 앞서 지나간 메신저들은 많았다. 그의 어머니는 진리의 여인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일용할) 양식을 먹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표시들을 그들에게 분명하게 보이신 방식을 주목해 보라;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 그들이 잘못 알고 진리에서 벗어나버렸는지를 보라!”(알 마이다, 5:75)” 이 구절은 예수가 단지 하나의 예언자에 불과한 분이 아니며, 아주 독특한 분이시다. 왜냐하면 어떤 예언자에게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에게서 온 영”이라고 일컬어지지 않기 때문이다.(알 니사, 4:171) 

이러한 구절들이 그러면 무슬림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게끔 할까? 그들은 해석을 달리한다. 볼프는 쿠사의 니꼴라스(Nicholas of Cusa)가 이 구절에 근거하여 무슬림들이 마땅히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할 것을 기대했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그렇게 해석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예수는 여전히 하나의 예언자일 뿐이다. 이에 반해, 볼프가 말하고 있듯이,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는 한낱 예언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육신 하신 분이다. 

 

이처럼 기독교 삼위일체 하나님의 단일신성을 강조한다고 하여도 삼위일체론의 출발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이해의 간격이 좁혀지지 않는다면 기독교인들이 무슬림과 어떤 종교적 동질감을 갖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별히 요르단 복음주의 신학교(Jordan Evangelical Theological Seminary)의 이마드 쉬하디(Imad N. Shehadeh)의 네 번에 걸친 논문을 보라. 이슬람과 기독교의 신학의 간격이 얼마나 큰 지를 잘 말해준다. 꾸란의 예수(Qur’anic Christ)에 대한 글들을 통해 나타난 예수는 성경의 예수와 간격을 좁힐 수가 없다. 이 사실은 큉과 볼프에 의해서도 그대로 확인이 되고 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볼프가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든지 줄여보려는 노력에서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 하나님에 대한 공동의 믿음들 여섯 가지와 공동의 신앙 실천사항 두 가지를 묶어 그것만으로도 동일한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판단해도 될 만큼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말하였지만, 설득력은 약하다. 

 

나가는 말

무슬림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단지 사회에 평화와 질서를 더욱 더 높이기 위한 것이라면 큉의 접근법도 일정한 정도 타당성이 있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한 나눔이라면 종교적 차이가 서로 걸림이 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일반은총의 영역 안에서 나누는 대화는 서로의 차이점을 의식하고 문제를 삼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 간의 대화가 영적인 진리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슬람은 유대교와 달리 기독교와 종교적 기원에 있어서 역사적 뿌리를 같이 하고 있지는 않다. 적어도 예수의 하나님은 유대의 하나님이었다는 점에서 기독교와 유대교는 뿌리를 같이 한다. 그러나 기독교와 이슬람은 어떤 점에서 뿌리를 같이 하는가? 이슬람이 기독교에 속하였다가 갈라져나온 분파인가?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들과 동일한 하나님을 예배하였듯이 이슬람도 기독교와 동일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역사적이며 종교적 일치성은 사마리아와 유대 사이의 일치성에 비해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현저히 약하다. 이슬람의 꾸란은 기독교의 장경의 일부가 아니며 포함이 된 적도 없다. 그런 만큼 동일한 참 한 분 하나님을 예배하며 신앙을 한다고 말하기에는 신론적 이해의 서로 다른 차이점이 공통점 못지 않게 크다. 더구나 서로 예배하는 방식과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며, 그 결과 구원론과 종말론의 이해가 서로 다르다. 그러할진대 과연 그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와 이슬람이 동일한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라고 할 수 있을까?  예배론으로 나아가 하나님께서 이슬람의 예배도 받으시는가의 문제로 나가면 더욱 더 복잡해진다. 

 

그러면 이슬람을 마귀의 종교로 볼 것인가? 큉과 볼프의 노력은 이 질문에 대하여 “단연코 아니오!”라는 답을 주기 위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큉과 볼프는 둘 다 필요하고도 적절한 노력을 행한 것으로 좋은 평가를 받을만 하다. 어떤 종교가 마귀적인가의 문제는 그 종교가 보편적 도덕 가치를 바르게 가르치고 존중하며 행하는가에 따라 판단이 되어야 할 것이다. 유대교는 물론 범신론인 불교조차도 마귀의 종교로 보아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단일신론에서 범신론 체계로 나아갈수록 진리에서 거리가 멀어지고 그런만큼 마귀적 요소가 가입이 될 개연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종교자체의 창시와 그 종교의 인도를 마귀가 이끌고 있다는 의미에서의 마귀종교라는 말은 지나친 말이다. 그것들 모두가 일반은총의 영역에 들어와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일반은총의 영역 안에서 이 세상에 평화의 질서를 세워가며 대화와 공존의 시대를 누리기 위한 목적으로 대화를 나누기 위하여 공통점을 찾기 위한 노력이라면 큉의 방법이라도 필요할 때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선교적 관점에서 볼 때는 어떠한가? 분명 이슬람은 여전히 구원을 받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필요로 하는 여러 종교들 가운데 있는 하나의 종교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유대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유대주의는 구약이라는 경전을 기독교와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선교란 창조주 하나님을 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임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이슬람의 단일신론이 복음 전도의 접촉점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크게 활용할 일일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큉과 볼프를 읽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고 판단이 된다. 그러나 큉의 방법은 위험하여 받을 수 없으며, 볼프의 방법은 유익하지만 기대하기 어려운 조언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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